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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그 중심에 선 대구·경북인 .2] 대구 만세운동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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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운기자 박관영기자
  • 2019-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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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 동참’ 망설이던 이만집, 이갑성이 전달한 독립선언서 읽고 결심

계성학교 아담스관 지하실은 3월8일 서문시장 만세운동 당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던 곳으로 지금은 탁자 위에 태극기를 전시해 그날의 역사를 되새기고 있다. 계성학교는 교사와 학생 대부분이 대구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구 중구 남산동에 위치한 남산교회에는 대구 만세운동을 이끈 이 교회 장로 백남채, 조사 김태련, 김태련의 장남 김용해, 이만집 목사의 부조가 걸려있다.
3·1운동은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시작된 후 3개월여 동안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대구는 모두 6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3월8일 서문시장 만세운동이 첫 시작이었다. 이후 10일과 30일 남문밖 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4월 들어서는 대구 인접 달성군 지역에서 3차례 소규모 산발적인 만세시위가 있었다. 4월15일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현 대구시 남구 대명동), 26일과 28일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현 대구시 동구 미대동) 만세시위가 그것이다. 가장 먼저 일어난 3월8일 서문시장 만세운동은 일제의 특별경계 속에서 기독교계 인사들과 계성학교, 대구고보, 신명여학교, 성경학교 등의 교사·학생들이 중심이 돼 ‘대한독립’을 외쳤다. 이날의 함성은 일제의 억압과 탄압에 숨죽여 살아온 순수한 민중의 염원이 담겨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한 맺힌 외침도 내재되어 있다. 특히 대구의 저력을 다시한번 보여준 ‘역사적인 거사’였다. 그 시작에는 한 사내가 있었다.

#1. 겨울 밤 대구로 온 한 사내

다닥다닥 붙은 집과 골목은 어둠 속에서 닿을 수 없이 멀어 보였다. 그 어둠속으로 한 사내가 들어섰다. 발걸음은 묵직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낮고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맹렬하던 겨울바람이 겨우 숙진 밤, 뚜벅 뚜벅 뚜벅, 그 종잡을 수 없는 소리가 신경을 바짝 조였다. 숨죽인 골목에서 발자국 소리는 마치 굉음처럼 들리는 듯했다. 몸 속 구석구석 모든 신경세포가 일제히 곤두섰다. 기어이 어둠의 입자가 허파 속에 스며들었고, 차고 냉랭한 공기는 목울대를 할퀴었다. 그때마다 사내는 수시로 주위를 살폈다. 감시가 어느 때보다 삼엄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던 터였다. 순간 명치끝으로 원통함과 서러움과 분노가 북받쳐 올라왔다. 사내는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를 빼앗긴 비통함’과 ‘무기력함’은 울분이 되어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절망은 깊었다. 하지만 사내는 마음을 다잡았다. ‘곧 타오를 불씨는 들불이 될 것이 틀림없다’며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리고 다시 묵직한 걸음을 옮겼다.

1919년 2월24일 밤, 대구로 몰래 들어 온 사내는 이갑성이었다. 일제의 감시가 갈수록 삼엄하던 때였다. 대구 출신인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세브란스의전 부속병원에 근무하던 그는 서울에서 3·1운동을 준비하며, 대구를 포함한 남부 지역의 조직과 연락책을 맡았다. 독립선언서 배포도 그의 일이었다.


대구 기독교 인사·교사들과 거사 논의
‘3월8일 오후3시 서문시장’서 펼치기로
비밀리에 독립선언문 등사·태극기 준비
계성·신명여학교 등 학생들도 적극 동참

일경, 3·1만세운동 확산되자 감시 강화
거사 직전 홍주일·백남채 먼저 붙잡아
대구, 절체절명 위기에도 물러서지 않아



대구로 내려온 이갑성은 곧장 남성정 교회(현 제일교회)에 들러 이만집 목사와 남산정 교회(현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 계성학교 교사이자 남산정 교회 장로 백남채 등을 만났다. 이갑성은 이 자리에서 서울을 비롯한 전국적인 만세운동 계획을 전했다. 그리고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국제사회에 독립을 청원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대구도 거사에 동참해야 합니다.”

이갑성의 표정엔 결기가 묻어났다. 대구측 인사들도 그의 절박한 말에 귀 기울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갑성은 거사 계획을 설명하면서 대구 대표로 이만집의 서명을 요청했다. 대구 기독교계 지도자였던 이만집도 파리강화회의 등 국제정서를 익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구측 인사들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만세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루기 어렵다는 판단이 앞섰다. 더욱이 대구에 주둔한 일본 군대가 나설 경우, 민간인 희생이 속출할 것이라는 우려도 컸다. 결국 이갑성은 확답을 듣지 못한 채 서울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2.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1919년 3월1일, ‘대한독립 만세’ 함성이 서울을 뒤덮었다. 골목에서 뛰쳐나온 함성은 대로에서 더 큰 함성을 만들었고, 절박한 외침은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함성은 이내 산을 넘고 다시 강을 건너 거대한 들불로 번졌다. 들불은 낮의 해와 밤의 달과 함께 시뻘겋게 달아올라 전국을 뒤덮었다. 대.한.독.립.만.세. 절절한 함성과 절박한 외침은 쉼없이 연일 전국 곳곳에서 울려퍼졌다.

이갑성은 마음을 다잡았다. 대구측 인사들을 다시 설득해야 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갑성은 곧장 세브란스의전 학생 이용상을 불렀다. 그리고 독립선언서 200매를 건네주며 대구의 이만집을 찾도록 했다. 3월3일 독립선언서를 받아든 이만집의 시선이 가볍게 떨렸다. 선언서에 적힌 한맺힌 절규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만집은 빠르게 움직였다. 대구의 만세시위를 결심하고 거사 준비에 들어갔다. 곧장 남산정 교회 조사 김태련과 신정교회(현 서문교회) 장로이자 계성학교 교감인 김영서와 접촉했다. 이들은 논의 끝에 거사 날짜를 못박았다. ‘3월8일 오후 3시’(오후 1시라는 자료도 있다). 장소는 ‘서문밖 시장’ 즉 서문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합의했다. 3월8일은 장이 서는 날이고 마침 토요일이기도 했다. 오후 시간대는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동참할 수 있는 적기였다. 거사 날짜와 장소가 확정되자 이번에는 동지규합에 나섰다. 이후 신정교회 목사인 정재순과 장로 정광순,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최상원·최경학·권의윤이 동참했다.

기독교계와 학교측 인사로 진용을 갖춘 이들은 각자의 역할을 정해 일을 진척시켰다. 남산정 교회 조사 김태련은 독립선언문을 남산동 자신의 집에서 등사판으로 200매 더 인쇄하기로 했다. 또 거사 전날인 3월7일 밤을 새워 태극기 40매를 준비키로 했다. 이만집은 인원 동원,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와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최상원·최경학·권의윤 등은 자신들의 학교 학생을 포섭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의 동참도 중요했다.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도 그 중 하나였다. 마침 3월7일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숭실전문학교에 다니던 김무생이 대구에 내려와 대남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그가 머물던 여관 주인 아들이 대구고보 4학년 허범이었다. 김무생은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을 여관에 불러 허범과 함께 거사를 논의했다. 당시 대구고보에는 신현욱, 백기만, 하윤실, 김수천이 각 학년의 조직을 책임지고 있었다. 김재소와 이상화도 핵심 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은 김무생과 함께 허범, 신현욱을 다시 만나 만세운동 동참을 제안하고 의기투합했다.

신명여학교 학생들의 참여는 김무생과 신명여학교 교사 이재인, 졸업생 직원이던 임봉선, 졸업생 이선애가 맡았다. 여기에 당시 대구에 개설돼 운영 중이던 성경(성서)학교도 가세했다. 성경학교는 경북도내 각 지역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 참여하는 학교였다. 성경학교 동참은 의성군 산운면의 교회 조사인 이태학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 서울에 머물다 3월7일 대구에서 이만집을 만났고 성경학교 강습생들에게 만세시위 참가를 권유했다. 거사 준비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계획대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3. 거사 직전 불길한 기운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일제는 날을 세웠다. 함성이 거세질수록 총칼의 살기도 시퍼렇게 달아 올랐다. 대구도 예외일 수 없었다. 어느 때보다 감시가 삼엄했다. 이러한 가운데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일경은 3월4일 예비검속에 나서 천도교 경북교구장인 홍주일을 붙잡았다. 홍주일은 대구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였다. 일제는 강점기 시절 예비검속을 명분으로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범죄 방지를 명목으로 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인물을 사전 구금해 활동을 제약한 것이었다.

홍주일이 붙잡혔다는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다. 거사를 준비하던 대구측 인사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거사 직전인 3월7일, 또 다른 변수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가 예비검속에 걸려 붙잡히고 말았다. 일경은 중국 북경대학을 유학하고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하고 있는 것으로 백남채를 의심하고 있던 터였다. 계획이 틀어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백남채가 붙잡힌 날, 뜻하지 않은 비가 내렸다. 비의 입자들이 짙은 비린내를 몰고 왔다. 비리고 숨막히는 냄새는 무겁고 역했다.

거사 직전의 비는 불길해 보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주저하지 않았고 물러서지 않았다. 남산교회 지하실과 김태련의 집에서는 독립선언서 인쇄와 태극기 제작이 계획대로 진행됐다. 또 계성학교 아담스관 지하실에서는 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등사됐다. 그리고 마침내 3월8일, 비가 개고 날이 밝아왔다.

글=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대구독립운동사. 경북독립운동사. 권녕배의 논문 ‘대구지역 3,1 운동의 전개와 주도층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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