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여든 다섯에 생애 첫 시집 낸 김용기옹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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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01   |  발행일 2019-02-01 제35면   |  수정 2019-02-01
“금융맨 외길…돈의 삶에선 잘 못봤던 道, 이치 파고들면서 詩 매력에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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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의 냄새가 감도는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시편을 다듬는 시간이 더없이 행복하기만 하다.

85세에 생애 첫 시집 ‘역설의 세계’(문학의전당)를 펴내며 시인이 된 사람이 있다. 평생 금융인으로 살아온 86세의 김용기옹. 그의 시집에는 한(恨)이 잔뜩 묻어 있다. 가족을 위해 일생을 헌신해야만 했던, 그 시절 부모세대만이 갖고 있는 자기연민에 대한 ‘회상기(回想記)’, 어쩜 고생한 자기한테 주는 ‘헌사(獻辭)’ 같은 건지도 모른다. 그 시절엔 시대와의 불화로 말은 항상 억압되고 굴절되고 왜곡되었다. 그 시대와 지금 이 시대 사이엔 커다란 괴리가 있다. ‘세월의 구멍’이다. 그는 그걸 ‘역설(逆說)의 세계’로 명명했다. 그게 첫 시집 제목이 돼버렸다. 어쩜 그는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 시집이 세대 간 단절을 막는 하나의 가교(架橋)가 되기를 기원한다. 그는 스스로를 ‘질곡의 한국근대사를 살아온 김노인’이라고 낮춰 불렀다. 경주에서 태어나 경주중·고를 나온 그는 여러 격랑기를 다 훑고 지나왔다. 일제강점기, 광복 직후 좌·우익 충돌기,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을 몸소 체험한 세대다. 그는 현재 대구 남구 봉덕동의 한 아파트에서 말년을 조용히 살고 있다. 책을 읽고 잠시 산책하는 시간을 빼면 몸이 불편한 아내 뒷수발에 올인해야만 한다. 이제 더 바랄 게 없다. 단지 아내와 함께 가장 평화롭고 소박한 말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오는 2월15일 노부부는 정들었던 대구를 떠나 서울 아들 곁으로 이사를 갈 예정이다. 시인답게 그는 빙그레 웃으며 그 길을 ‘고려장길’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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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생애 첫 시집을 펴내고 늦깎이 시인이 된 그는 세대 간 단절된 언어를 복원하고 그늘에서 소일하고 있는 실버세대들이 양지로 나와 자신만의 연대기를 꽃피워주길 바라고 있다.

난 질곡의 한국근대사 살아온 김노인
지금은 아내와 평화롭고 소박한 말년
조만간 서울 아들곁으로 이사 갈 예정
그 길은 ‘고려장길’이 되겠지 허허허

대구銀 금융문화 초석 다지는데 외길
詩 만나기전 자식부양 일속에서 생활
정년·백수 되고보니 초라한 내가 보여

여든 넘어 문인 삶 말해준 관상가 예언
동양철학·서양학·빅뱅이론 파고들어
노인은 인생의 발효 식품 ‘절정의 맛’
늦깎이 시집 실버세대와 공감 하고싶어
젊은세대와 단절된 언어 복원도 바라

▶참 늦깎이로 등단하신 것 같네요.

“누군 날 시인이라는데 실감나지 않아요. 난 그냥 평범한 시민이에요. 단지 고단하고 신산스러운 세월 속에 스며들어가 있는, 말로도 글로도 설명되지 않는 역설의 세상사를 털어놓고 싶었어요. 그렇잖아요. 세상이 자기 맘대로 살아지지가 않잖아요. 나도 시를 만나기 전에는 일 속에서 일어나 일 속에서 잠이 들었어요. 그때 어른들은 일밖에 몰랐잖아요. 정년하면 다들 뒷방 늙은이로 추락하고, 채 일흔도 못돼 다들 저승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젠 환갑잔치를 거부하는 100세인생 시대잖아요. 뭐랄까, 그들에게 조그마한 희망, 아니 자신감을 전해주기 위해 시집을 냈어요. 이건 전혀 문학적인 건 아니에요. 조금 특별한 일상이라고나 할까요. 허허허.”

▶일별해보니 단순한 시집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 제목이 역설의 세계인데, 시에서 늙음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젊은시인이 적은 것 같아요.

“역설, 그래요, 삶이란 게 모순이고 역설이죠. 살다보면 진심이 부정되기도 하고 때론 범죄도 저지르고 왕따가 되기도 하죠. 검은 게 흰 것으로, 흰 것이 검은 것으로 둔갑되고…. 왜곡되는 게 바로 삶 아닙니까. 그때는 시 같은 걸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오직 자식부양이 지상명령이었죠. 그런데 정년하고 백수가 되고보니 비로소 초라한 제 자신이 보였습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인생과 운명의 함수관계에 대해 궁구했는데 나중에는 더 미궁으로 빠져들었어요. 제가 무슨 천문·물리학자가 된 것처럼 난해한 인문학의 세계로 걸어가게 됐습니다. 그 밑바닥에서 만난 게 시였어요. 82세 무렵이었나.”

▶시공부는 어떻게 했습니까.

“대구교육대 평생교육원 문예대학 내 시창작교실이란 게 있는데 거기 입학했죠. 그 와중에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한국불교문인협회와도 인연을 맺고 대구생활문인협회에도 이사로 간여하게 됐습니다. 새로운 단상이 떠오르면 신문 여백 등에 마구 끄적거렸습니다. 갈무리 해둔 시편이 수북하게 쌓여만 갔고, 그런 어느 날 제 시를 보게 된 지도선생(구석본 시인)의 권유로 시집이 묶여지게 됐습니다.”

▶평생 금융인으로 살아오셨다면서요.

“대학 때 경제사상사에 푹 빠졌어요. 이때 어쩔 수 없이 마르크스경제학을 만났죠. 그 학문은 한동안 동아시아 청년들에게 묘한 환상을 심어줬어요. 광복 즈음 국내에서 공부 좀 한다는 지식인은 죄다 사회주의·마르크스사상에 빠져 들었죠.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상당수 지식인들은 유행병처럼 월북해버렸죠. 그런데 저는 어떤 시류에 잘 휩쓸리지 않았어요. 흐름의 본질이 뭔가를 잘 성찰하려고 했어요. 물론 4·19때는 학우와 함께 이승만 하야를 외치면서 광화문 앞으로 시위하러 달려갔죠.”

▶첫인상이 무척 사색적인 것 같았어요. 금융맨보다 학자가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네요.

“졸업 후 중소기업은행에 다녔고 대구로 와선 대구은행 금융문화의 초석을 다지는데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때 만난 제 대학 선배인 김준성을 잊을 수 없습니다. <주>이수화학 회장으로 작고한 그는 대구가 자랑하는 재계 인물이었죠. 광복 직후 대구에서 메리야스 공장을 차렸고 1967년에는 대구 지역 상공인들의 힘을 모아 국내 최초의 지방 은행인 대구은행을 설립할 때 초대 행장을 지냈죠. 서울에 있을 때 그 선배가 대구은행장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런 연유로 저도 대구로 오게 됐습니다. 직장일은 그렇게 생리에 맞지 않았어요. 외국유학이라도 다녀왔다면 평생 교수로 삶을 마감했을 수도 있었겠는데…. 집안 형편도 별로 좋지 않고 해서 그냥 은행 외길을 걸었어요.”

▶어떻게 2부인생을 설계했는지 궁금하네요.

“지난 IMF외환위기를 거치면서 1부인생을 정리했어요. 일단 책과 사귀었습니다. 그렇게 사색과 탐구의 인생2기가 전개됐죠. 저는 사람의 운명과 팔자, 그리고 세상의 근원이 정말 궁금했어요. 사람의 일생은 정해진 걸까. 처음에는 동양철학을 밑에 깔고 주역, 명리학, 추명학, 풍수지리학 등을 파고들었습니다. 하지만 궁금증은 더 커져갔습니다. 서양과학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점점 천문학, 양자물리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스티븐 호킹의 우주탄생이론, 블랙홀과 빅뱅이론 등으로 건너갔습니다. 자연스럽게 불교철학의 요체랄 수 있는 유식론, 그리고 무위자연철학의 진수가 녹아들어가 있는 노자철학, 용수보살이 설파한 중론사상 등과도 만나게 됩니다. 명리학 관련 도서를 1천여권은 접했던 것 같아요.”

▶그때 여러 깨달음이 들었겠습니다.

“저는 늘 제 삶이 83세에 끝날 것 같았어요.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는 단어 중에 ‘정명(定命)’이란 말이 있어요. 임종, 수명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서울에서 꽤 유명한 관상가인 백운학을 만났어요. 대뜸 그가 그런 예언을 했습니다. 82세 때 무인의 삶에서 문인의 삶으로 터닝하게 됩니다. 83세가 되었는 데도 죽을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백운학 생각이 나더군요. 그 예언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지난 시절, 돈의 삶에선 도(道)가 잘 보이지 않았어요. 이치를 파고들면서 저는 ‘예술(藝術)’, 특히 시(詩)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됐습니다.”

▶시집을 낼 때 많은 생각이 들었겠습니다.

“서문을 대신 읽어드리죠. ‘나는 시를 쓰면서 시를 위한 시가 아닌 자연과 인간의 일상을 사색해 보는 짧은 글로서의 시를 쓰려 했고, 내 글을 읽을 독자들의 이해와 공감을 중요시했다. 이제 졸수(卒壽)를 바라보며 좋은 시를 쓰기에는 너무 늙었음을 깨닫게 됐지만 그러나 그런대로 느낌을 남기고 싶은 노인의 미련으로 시집을 묶는다’라고 적었어요. 이 나이에도 시집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실버세대와 공감하고 싶었어요. ‘노인’이란 시에서 저는 ‘노인은 인생의 발효식품’이라고 말했어요. 잘 숙성된 김치와 된장 등을 보세요. 절정의 맛이잖아요. 노인이란 그런 파워를 갖고 있어요. 청년백수들도 함께 힘을 냈으면 싶어요.”

▶그 시절 언어와 지금 시절의 언어가 단절된 것 같아요. 선생님도 그걸 절감하시죠.

“제 시 중에 ‘귀향열차’란 게 있어요. 처음엔 무슨 뜻인 줄 모르고 편집진이 촌스럽다면서 빼자고 해요. 저는 절대 안 된다고 했죠. 다들 단순하게 고향가는 열차로 알지만 아니에요. 민초들의 애환이 묻은, 그 시절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피눈물 묻은 기차입니다. 저는 방학이 되면 청량리역에서 고향행 중앙선을 탔어요. 지금은 ktx지만 그때는 석탄증기기관차였어요. 한번은 가파른 죽령터널 중간에서 기차가 퍼져버렸어요. 그때 객실을 덮친 유독가스 때문에 죽어나간 시신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기자 양반, 이해되세요? 지금 젊은이들은 ‘나무 하러 간다’ ‘소 먹이러 간다’는 속뜻을 잘 모를 겁니다. 말의 공감대가 사라진다는 것, 그건 세대 간 단절이죠. 제가 시를 적는 이유도 그 단절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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