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음악 창의도시 대구 .9] 戰後 대구의 대중음악(下)-재즈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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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07   |  발행일 2019-02-07 제14면   |  수정 2019-02-07
재즈 암흑기 1980년대, 대구에선 첫 재즈 연주단의 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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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대표적인 재즈클럽인 올드블루 내부 전경. 2011년 대구시 중구 삼덕동으로 자리를 옮긴 올드블루는 1988년 동성로에서 올드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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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밴드 빅타이거가 올드블루에서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대구의 재즈 스펙트럼은 정통 재즈는 물론 춤이나 연극 등 다양한 예술장르와 결합할 정도로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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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 퀸텟이 올드블루에서 재즈 공연을 펼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대구에서도 해외파 재즈 뮤지션이 등장했으며 실험적 재즈 또한 발전했다.

대구에 관악기가 유입된 것은 20세기 초다. 이후 종교와 학교를 중심으로 한 브라스밴드 문화가 전개되었고 광복 당시에도 계성고와 대륜고 악대, 도청관악대 등이 존재했다. 이후 악대 운동은 어느 음악분야보다 먼저 일어나게 되고 미국식 교육제도가 도입되면서 고등학교의 밴드부 활동으로 이어졌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피란지 대구는 한국 음악의 중심이 된다. 다양한 군악대가 창단되면서 각 학교에서 배출된 관악연주부원들이 군악대에 흡수되었다. 그들이 훗날 한국 대중음악과 클래식계의 개척자가 된다. 군악대원들은 미군부대 클럽 등에서 팝송이나 재즈를 연주하기도 했다. 이후 주한미군이 증가하면서 한국 연주 1세대들은 AFKN을 통해 재즈를 접하고 주로 미8군 무대를 통해 데뷔하게 된다.

#1. 미군이 있는 곳에 재즈가 있었다

광복 이후 일본군이 떠난 자리에 미군이 주둔했다. 1946년에는 미국 본토에서 온 재즈 전문 빅밴드가 대구 캠프헨리 장교클럽에서 연주하기도 했고, 미군들은 본토에서 공수해온 악보를 지역 연주자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당시 국내 밴드는 수요와 연주 실력에 있어서 미군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6·25전쟁기와 특히 휴전협정 이후 주한미군의 규모는 더욱 커진다. 미군을 위한 AFKN 방송이 1957년부터 한국에 방영되기 시작했고 미8군 쇼 무대도 확대되었다. 미8군 쇼는 음악을 중심으로 무용, 코미디, 마술 등이 가미된 버라이어티 쇼에 가까웠다. 음악은 빅 밴드 편성의 악단이 재즈를 위주로 컨트리, 리듬앤블루스, 로큰롤 등을 연주했다.

확대된 미8군 무대는 국내 가수와 연주인들에게 새로운 무대를 제공했다. 국내 음악인들은 미국에서 직접 파견된 음악전문가가 심사하는 엄격한 오디션을 거쳐 미8군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이 시절 미8군 가수들은 ‘재즈싱어’라 불렸다. 연주자들의 독자적 입지가 강화된 때도 이 시기다. 1950년대 후반 미군 무대가 한창 정점에 다다랐을 때 미군 클럽은 264곳에 이르렀고 미군 쇼를 통한 한국 연예인들의 수익은 연간 120만달러에 육박했다고 한다. 평론가이자 작곡자인 황문평은 ‘미군이 주둔한 곳에 재즈 밴드가 동원되어 원시적인 외화획득의 효시가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2. 카바레, 나이트클럽으로 간 연주자들

1950년대 말, 재즈와 스탠더드 팝은 로큰롤에 팝 음악의 주류 자리를 내주었고, 1960년에 접어들면서 10인조 이상의 빅 밴드보다는 소 편성의 악단이 미8군 무대에 오르게 되는데 이러한 편성은 기타를 상대적으로 비중 있는 악기로 부각시켰다. 196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주한미군의 수가 줄어들고 미군 쇼 무대 또한 축소된다. 미8군 쇼 무대에서 단련된 음악인들은 1960년대부터 대중을 상대로 한 ‘일반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광복이후 6·25 거치며 주둔 미군 증가
재즈밴드 동원되며 외화 획득 효시로
60년대 미군 수 줄면서 쇼 무대 축소
연주자들 카바레·나이트클럽에 몰려

80년대 명맥만 근근이 이어간 암흑기
대구엔 첫 연주단 ‘다운비트’ 생기고
전국규모의 모임·재즈클럽 등 문열어

2000년대 국제급 연주자 급격히 증가
대구 재즈 춤·연극·굿과도 결합 실험적
10년 이상 국제재즈축제 이어지는 중



대구에는 국제, 국일, 대안, 대화 등의 카바레와 금호, 수성 등 호텔 나이트클럽이 성행했다. 이 때는 밴드 연주자가 가수를 압도하던 시절이었다. 1급 연주자는 나이트클럽에 집중되어 있었다. 유흥업소에서는 경음악단과 탱고밴드, 록밴드 등이 연주했다. 이 중 경음악단이 주로 재즈음악을 연주했다. 손님이 많은 시간대에는 팝과 가요를, 손님이 다소 뜸한 조용한 시간에 정통 재즈를 연주했다. 60년대 말에는 전자오르간이 등장했다. 대구에서는 1969년 향촌동 비어홀 ‘궁전’이 1인 오르간 주자 시대를 열었다. 대구 첫 오르간 독주자는 박석현이었다. 그는 유차목, 서광수, 육혜진 등과 함께 대구의 1세대 오르간 연주자로 70년대를 주름잡았다.

1970년대 초반 향촌동에서는 왕중왕, 아세아, 왕비, 여왕, 오양주 등의 살롱과 바가 성행했다. 그때 수성못 근처에 ‘역마차’ 살롱이 문을 열었다. 음악은 색소폰주자 김인한을 중심으로 한 5인조 밴드가 맡았다. 역마차가 승전하자 그 옆에 수정, 호수 카바레가 들어섰고 76년에는 대백 11층에 ‘맥심 나이트클럽’이 등장한다. 80년대는 회관 시대였다. 84년 달성네거리 근처에서 생겨난 ‘부광회관’이 선두주자였고 이후 극장식비어홀 ‘카네기’가 돌풍을 일으켰다. 회관문화는 대구에서 발원해 전국 각처로 번져나갔다.

#3. 대구 첫 재즈 연주단 ‘다운비트’

1970년대부터 80년대 대중가요계의 중심에는 포크와 록이 있었고 상대적으로 재즈는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음반 발매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재즈를 듣거나 연주할 장소도 제대로 없었다. 서울에서는 ‘올댓재즈’와 ‘야누스’와 같은 재즈클럽과 김준, 김수열, 신관웅, 이동기, 정성조 등의 전문연주자들이 한국 재즈의 명맥을 이어가는 정도였다. 재즈의 암흑기라는 1980년대 대구에서 첫 재즈 연주단이 탄생했다. 1985년 10월에 창단된 9인조 ‘다운비트재즈연주단’이다. 창단 멤버는 조현태(보컬 겸 편곡), 유차목(트럼펫), 김상직(색소폰), 김일수(색소폰), 김기풍(드럼), 임영수(기타), 박문희(피아노), 김돈수(베이스) 등으로 모두 원곡을 다양하게 재즈적으로 편곡할 수 있고 독주 애드리브도 소화할 수 있는 미8군 출신의 실력파들이었다. 다운비트는 시내 동인호텔 서쪽에 있었던 ‘남태평양’ 스탠드바에서 창단공연을 했다. 작곡가 길옥윤은 축전과 화환을 보내 이날 공연을 축하했다.

유차목이 ‘남태평양’의 사장이었다. 그는 한국 브라스밴드의 요람인 해군군악대 출신 트럼펫 주자이자 대구 전자 오르간 연주 1세대이기도 하다. 현재 그는 남구청 근처에서 주점식 노래방 ‘트럼펫’을 꾸려가고 있다. 김일수는 육군 20사단 군악대 출신으로 1996년 지역 색소포니스트로는 처음으로 대학 강단에 섰다. 그는 국악, 가요, 영화와의 크로스오버 재즈 무대도 끌어냈으며 현재 대구색소폰앙상블을 맡고 있다. 김일수는 2000년 김상직과 함께 재즈라이브클럽 ‘OB캠프’를 오픈하기도 했다. 임영수는 미8군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편곡자 겸 기타리스트다. 그는 지금도 대구 캠프워커 내 클럽인 ‘에버그린’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

#4. 재즈클럽

1984년 재즈 보컬 김준을 중심으로 ‘한국재즈모임(KJC)’이 결성되었다. 전국 규모의 재즈모임이었다. 1989년에는 대구재즈모임이 결성되었다. 이 모임의 정기 재즈감상 아지트가 1988년 박재수가 동성로에 오픈한 재즈클럽 ‘올드뉴(Old new)’였다. ‘올드뉴’에서는 주1회 대구재즈모임 주관으로 재즈감상회를 가졌다. 당시 재즈음원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곳은 마니아의 개인 감상 공간이나 재즈클럽 정도가 전부였다.

1991년에는 올드뉴의 초기 매니저였던 김종우가 ‘올댓재즈(All that jazz)’를 오픈했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재즈 라이브를 볼 수 있는 재즈클럽이었다. 자칭 포크 가수인 대구 출신 ‘김마스타’는 ‘올댓재즈’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블루스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무렵 시내 금융결제원 근처에 ‘에마뇽’이란 재즈클럽 스타일의 라이브 카페도 생겨났다. 올드뉴는 1995년 자리를 옮겨 ‘올드블루(Old blue)’로 상호를 바꾸고 라이브 무대를 열었다. 유진박, 야누스의 박성연, 임희숙, 말로, 웅산 등이 올드블루의 무대에 올랐다. 올드블루는 2011년 삼덕동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한국 재즈는 록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와 결합한 퓨전재즈로 발전하고 점차 대중의 주목도 받게 된다. 재즈를 앞세운 간판들이 늘어났고 테이크파이브, 댓, 더코너 등 라이브 무대가 있는 재즈카페와 클럽도 증가했다. 근래에는 대구재즈모임 초대회장인 이용욱이 운영하는 재즈클럽 ‘버드(Bird)’, 재즈 마니아 이정회가 꾸려나가는 ‘크리스’, 250석 규모의 콘서트홀이 있는 재즈클럽 ‘베리어스’ 등이 대구 재즈신(scene)을 풍성하게 하고 있다.

#5. 해외파 재즈 뮤지션의 등장

2000년으로 접어들면서 국내에는 국제급 재즈 연주자들이 폭증했다. 지역에는 이상직(색소폰), 김남훈(라틴 퍼커션), 윤태원(콘트라베이스), 정상원(비브라폰), 남경윤(피아노), 김정식(기타), 조별휘(피아노) 등 20여명의 유학파 뮤지션이 있었다. 가장 먼저 발 디딘 이는 1999년 2월, 미국 버클리음대와 뉴잉글랜드 음악원을 졸업한 비브라폰 주자 백진우다. 대구예술대 겸임교수로 온 그는 그해 ‘애플재즈빅밴드’를 창단했고 2000년에는 ‘바이브(VIVE)’란 재즈클럽을 열고 매일 연주를 강행했다. 2002년에는 4년제 대학으로서는 처음으로 실용음악과에서 재즈를 정규 과목으로 채택해 즉흥연주, 화성악 등 재즈이론을 가르쳤다. 2008년에는 대구국제재즈축제가 열렸다. 백진우는 축제의 산파 역할을 했다.

대구의 재즈밴드로는 김명환 트리오, 홍정수 재즈프로젝트, 브로큰타임, 빅타이거그룹, 베누스키, 써니재즈빅밴드, 더 펠로우즈 등이 있다. 드러머 김명환은 1999년 경북예고 옆에 ‘소리공간’, 2006년 삼덕동에 ‘재즈카페 소공’, 2015년 교동에 다시 ‘소공’을 열었다. 2016년에는 성기문과 이경영(피아노), 구교진과 강성민(콘트라베이스), 그리고 박재홍(보컬)과 함께 첫 앨범 ‘정서’를 냈다. 일제강점기 대중음악을 재즈로 풀어낸 앨범이다. 김명환과 호흡이 잘 맞는 성기문은 대구예술대 출신의 국내 정상급 하몬드 피아노 연주자다. 더 펠로우즈는 사업가 임배원을 주축으로 재즈 전공자 박영옥(보컬), 김대엽(드럼), 김종만(기타), 장진호(베이스) 등으로 구성된 밴드다. 임배원은 2017년에 국내 최초로 판소리와 민요를 재즈로 풀어낸 대형공연 ‘SOUL소리(영혼의 소리)’를 기획했다. 더 펠로우즈의 반주로 국창(國唱) 안숙선과 동부민요의 박수관을 비롯해 테너, 재즈보컬 등이 한 무대에 올랐다. 대구 재즈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정통 재즈는 물론 춤이나 연극, 전통 굿음악 등 다양한 예술장르와도 결합한다. 2010년 발매된 블루스기타리스트 이대희와 장구재비 이호근이 함께한 ‘장구블루스’도 주목할 만하다. 재즈는 실험적이고 예술은 재즈적이다. 이러한 가운데 대구국제재즈축제가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알랭 디스테르, 록의 시대, 시공사, 1997. 손태룡, 대구의 전통음악과 근대음악, 영남대학교출판부, 2018. 신용석, 고등학교 관악합주단의 변천사와 효과적인 지도방안 연구:대구·경북지방을 중심으로, 영남대학교, 2004. 영남일보, 대구 추억 기행, 2003~2004. 영남일보, 국가·시대·장르 넘나드는 재즈의 무한 변주…삶을 응원하는 흥의 원천, 2017. 영남일보, 대구에 울리는 루이 암스트롱의 ‘멋진 세상’…국제재즈페스티벌 10년째, 2017. 영남일보, 이사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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