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무장투쟁 진원지…3·1운동 등 민족 역량 결집 기반

  • 양승진,민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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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09 08:04  |  수정 2019-02-09 08:04  |  발행일 2019-02-09 제5면
■ 독립운동사서 ‘대구’ 의미
1915년 달성서 결성된 대한광복회
친일파 처단 등 의열단으로 이어져
‘항일 독립운동의 聖地’ 역할 톡톡

일제가 대한제국 침략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1900년대 초반, 대구에서는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차관 1천300만원을 상환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시작됐다. 서상돈 등 17명이 발기해 전국으로 확산한 국채보상운동은 3개월여간 4만여명으로부터 230만원을 모금하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정부 1년 예산이 2천300만원인 점을 고려하면 나라 빚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려 한 민초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 이후에도 대구는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시초로 여겨지는 대한광복회는 1915년 대구 달성(달성공원)에서 처음 결성됐다. 총사령 박상진, 지휘장 우재룡 등이 주축이 된 광복회는 대구본부를 중심으로 조선 8도와 만주에 지부를 두고 친일부역자를 처단하는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거사를 치른 뒤 남긴 ‘대한광복회’ 표식은 친일파 간담을 서늘케 했다. 국내에서 제대로 된 독립운동이 이뤄지지 않았던 1910년대에 이 같은 광복회의 활동은 1919년 3·1만세운동 등 민족적 역량을 모으는 기반이 됐다. 군자금 마련을 위한 일본인 부호 습격과 친일파 처단은 1920년대 의열단 등 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청산리 대첩’ 영웅인 김좌진 장군은 광복회 만주지부장이었다.

1919년 3월 ‘대한독립만세’가 영남지역에서 최초로 울린 곳도 대구다. 그해 3월8일 서문시장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3월30일까지 3회에 걸쳐 2천여명이 참가했다. 이후 4월15일까지 한 달여간 의성·청송·안동·예천 등 경북 각지에서 84회에 걸쳐 열린 만세운동엔 2만8천여명이 참여했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10년대 광복회의 결성과 무장투쟁은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며 “아쉽게도 대구엔 광복회 활동을 알리는 흔한 표지판조차 없다. 대구가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불리는 데는 광복회 활동이 지대했다. 이를 알릴 수 있는 기념사업이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양승진기자 promotion7@yeongnam.com
민경석기자 mean@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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