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다시 김만제를 생각하다

  • 김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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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18   |  발행일 2019-02-18 제31면   |  수정 2019-02-18
[월요칼럼] 다시 김만제를 생각하다

필자가 고(故) 김만제 전 경제부총리를 처음 만난 건 2000년 국회의원 총선 무렵이다. 당시 정치부 기자로 대구 수성구갑 선거구에 출마한 그를 만났다. 부총리·포항제철(현 포스코) 회장·한미은행장·삼성생명 회장·서강대 교수·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남들은 평생 노력해도 하나도 얻지 못할 자리를 여러 개 거쳤다. 그런 그가 2000년에는 국회의원까지 됐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평생을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위를 누리면서 살았다. 교만해질 법했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김만제는 항상 겸손했다. 찡그린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자기보다 지식을, 자기보다 화려한 경력을 가지기가 어렵기에 생긴 여유로 보였다.

그는 대구를 위해 참 많은 일을 했다. 지금의 디지스트(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김만제 때문이다. 대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이 발달한 도시가 돼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박종근 전 의원과 함께 디지스트 설립 법안을 주도했다.

내륙도시인 대구가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역할이 컸다. 그가 국회의원을 할 때, 바다를 끼지 않는 도시가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긴 어려웠다. 그는 현역의원 때부터 꾸준히 문제제기를 해, 내륙도시인 대구도 2006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2004년 총선 때, 한나라당의 세대교체론에 밀려 일흔이 된 그는 정계를 떠났다. 대구에 대한 애정은 국회의원을 그만둔 이후에 더 돋보였다. 그는 국회의원을 그만둔 후, 대구에서 낙동경제포럼이란 사단법인을 만들었다. 1주일에 한번은 낙동경제포럼 사무실에 들러 대구발전을 위한 역할을 했다. 그의 건강이 허락한 2012년까지 이런 활동은 계속됐다. 낙동경제포럼 사무실이 영남일보와 같은 건물 내에 있었기에, 대구발전을 위해 애쓰는 그의 모습을 나는 자주 봤다.

2010년 대구시와 대구상공회의소가 삼성그룹의 대구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김만제가 위원장을 맡았다. 삼성생명 회장 출신에 부총리·국회의원까지 거친 거물이기에, 삼성그룹 임원들을 움직일 수 있는 무게감이 그에게는 있었다.

김 전 부총리가 타계한 건 지난달 31일. 그를 다시 떠올린 건 대구가 여전히 어려운데, 지역출신 인사 중 그를 대신할 만한 인물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김만제처럼 정(政)·관(官)·산(産)·학(學)의 최고위직 경험을 두루 갖춘 이는 우리나라 전체를 둘러봐도 없는 듯하다. 대구경북통합신공항문제를 비롯해 반도체 클러스터의 구미 유치·대구 스마트시티 조성같은 현안 중 뭐하나 시원하게 풀리는 게 없는 것이 요즘 대구·경북이 처한 현실이다. 그래서 의지할 만한 인물, 존재감만으로 든든한 그런 인물이 그리운 상황이 내가 다시 김만제를 떠올리는 첫째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기조와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김만제는 1970~80년대 우리나라 고도성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서강학파’의 중심인물이다. 서강학파란 서강대 교수 출신의 경제관료를 지칭하는 것으로, 그들은 전형적인 성장론자다. 재벌중심의 성장, 수출 우선주의, 선(先)성장 후(後)분배가 그들의 정책기조다. 배고프던 시절 우리나라의 성장을 견인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성장엔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부(富)의 심각한 불균형, 노동자의 권익보다는 재벌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서강학파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게 학현학파다. 서울대 변형윤 전 교수의 호 ‘학현’을 딴 것이다. 경제의 중심에 인간을 두고 경제정의, 분배를 중시한다.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기조다. 당연히 성장보단 분배가, 재벌보다는 노동자가 중요 가치가 된다. 최저임금 인상을 비롯한 문재인정부의 정책들이 이런 기조 위에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고용참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고, 소득격차는 더 심해지고 있다. 분배도 없고, 성장도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김만제는 떠났지만, 그가 주도했던 정책기조는 언젠가 다시 살아날 것 같다.

김진욱 고객지원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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