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또 얼마나 많은 꽃들이 사그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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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20   |  발행일 2019-02-20 제30면   |  수정 2019-02-20
막장 자본주의·가진자 탐욕
약자들의 목숨 앗아가지만
정치권은 늘 사후약방문식
제출된 법안마저 정쟁얼룩
꽃피는 3월이 마냥 두렵다
[수요칼럼] 또 얼마나 많은 꽃들이 사그라질까
윤재석 경북대 사학과 교수

사람의 슬픔과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원인’을 노래하고자 한 음유시인 정태춘, 1993년 6집 앨범에 수록된 ‘사람들’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작년엔 만삼천여 명이 교통사고로 죽고, 이천이삼백여 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죽고, 천이백여 명의 농민이 농약 뿌리다 죽고, 또 몇백 명의 당신네 아이들이 공부·공부에 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압구정동에는 화사한 꽃이 피고, 저 죽은 이들의 얼굴로 꽃이 피고, 그 꽃을 따먹는 사람들, 입술 붉은 사람들”

이 노래는 1990년대 초반 민주화의 좌절과 자본주의가 초래한 사회적 모순의 심화 현상을 회한과 상실의 정감으로 갈무리한 당시 사회의 거울이라 할 만하다. 사고와 재해와 자살로 인한 죽음이 없는 사회가 어디 있으랴만 문제는 이것이 단순 사고나 재해의 결과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당 부분은 승자 독식의 신자유주의에 편성한 막장 자본주의의 병폐에 귀인하거나, 권력이건 자본이건 가진 자들의 탐욕 때문에 빚어진 인재라는 사실이다. 이 암울하고도 듣기 불편한 읊조림의 그림자는 2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짙다. 그동안 6명의 대통령이 국민의 생명을 지키겠노라 선언하였고, 연인원 2천여 명의 금배지들이 국민의 충복이 되겠노라 사자후를 외쳐댔지만 법과 제도의 미비로 인한 약자들의 억울한 희생은 지금도 무한 반복이다.

그나마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제정된 법과 제도는 거의가 약자들의 목숨 값이다. 사고가 나고, 죽음이 생기고, 여론이 들끓어야만 정치권은 위민(爲民)으로 포장된 사고 방지 관련 법안을 이따금씩 만들었다. 특정인의 이름을 붙인 법안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을 보라. 김용균법, 윤창호법, 태완이법, 나영이법, 장자연법, 그리고 세월호특별법 등. 약자들의 무고한 희생의 결과가 아닌 것이 없다. 산업안전보건법은 김용균 등 젊은 외주 노동자의 참혹한 사망의 대가이고, 음주 사고의 형량을 높인 도로교통법 및 특정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은 젊은 윤창호의 희생의 결과이며, 살인죄 공소시효의 폐지와 성범죄자 주취 감경 폐지는 어린 태완이와 나영이의 참혹한 희생의 대가이고, 불공정한 연예매니지먼트 계약 및 거래 방지 법안은 장자연의 억울한 죽음의 결과였다. 어느 하나도 정치권의 선제적이고 자발적 입법의 결과물이 아니다. 무고한 희생과 이로 인해 유발된 국민 분노의 힘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더욱이 이들 법안은 정당 간의 당리당략과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원안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각종 사회적 이해관계의 상충을 조정하지 못한 채 국민여론과 동떨어진 법안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예컨대 김용균법은 청와대 민정수석을 국회운영위에 세우기 위한 야당의 볼모로 악용되었고, 그 내용은 위험의 외주화를 막아내기에 역부족일 뿐 아니라 희생 당사자에게는 아예 적용도 되지 못하는 반쪽짜리로 전락하였다.

국민의 생명을 틀어쥐고 있는 정치권의 사후약방문식 대응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얼마나 많은 젊은이와 아이들이 희생되어야 우리 사회는 안전해질까. 그런데 작금의 법안처리 상황을 보건대 사후약방문이라도 좋으니 법안을 처리해주는 것만으로도 ‘존경하는 우리 OOO 의원님’ 앞에서 감읍해야 할지 모른다. 의안정보시스템에 의하면 2월 현재 국회에 계류되어 있는 법안만 1만2천 건이 넘는다. 이들 법안의 절대다수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재산에 관련된 것들이다. 그러나 국회는 정쟁에 골몰하느라 오늘도 개점휴업이다. 국회의 선제적이고 창의적 입법 의지와 능력의 부재도 문제이거니와 그나마 제출된 법안마저 정쟁으로 얼룩진 국회의 골방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하니 국회의 뒷북 입법마저도 삼배구고(三拜九叩)하며 감사에 감사를 더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비용 저효율의 최대 적폐집단이자 국민 분노 유발자로 전락한 정치권의 행태 속에서 3월에 맞이할 개학과 개화가 마냥 두렵다. 정태춘의 음유 가락을 타고 얼마나 많은 꽃들이 사그라질 것이며, 그 꽃잎을 따먹는 입술 붉은 정치인들은 대중의 분노를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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