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학의 박물관에서 무릎을 치다] 제 나라 떠나 낯선땅 내디딘 사람들의 고된 여정

  • 뉴미디어부
  • |
  • 입력 2019-02-22   |  발행일 2019-02-22 제38면   |  수정 2019-03-20
20190222
하와이에 정착한 닛케이 대가족.

혼절(昏絶)의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단어를 말하라면 나는 ‘이민’을 들고 싶다.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원하면 갈 수 있는 땅이 있고, 원했지만 갈 수 없는 곳이 있고, 싫어도 쫓기듯 가야만 했던 곳이 있다. 망향가만 부르면서 돌아오지 못한 땅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울컥한 순정으로 바라보지도 않고, 시절의 바람기로도 가늠할 수 없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역사의 현장이 되어버린 곳. 이제는 사회통합과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논쟁이 ‘이민박물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 삶의 방식에 대한 진솔함 ‘호주 빅토리아 이민박물관’

폐품으로 만든 비행기, 이민자들 출발점 환기
새로운 대륙에 대한 설렘·기나긴 항해 체험
가슴속 한편의 미안함·그리움에 대한 위로
과거 건물·다문화 역사 둘러보는 특별한 기행


20190222
호주 멜버른 ‘빅토리아 이민박물관’ 전경 .
20190222
이민자들이 갖고 있던 여권으로 꾸민 벽.
20190222
사람들은 비행기를 만들며 자신의 이민을 추억한다.

1770년 ‘테라 눌리우스’(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땅)라는 개념으로 시작된 호주의 이민제도에 대한 선입견은 백호주의(White Australianism)이다. 하지만 1973년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백호주의는 폐지되었다. 그 후 한동안 다시 규제가 강화되긴 했지만 최근 경기 활성화에 따른 노동 수요 급증으로 호주로의 이민은 증가 추세에 있다. 더 나은 삶을 찾아, 일거리를 찾아, 또는 전란을 피해 새로운 땅을 찾는 사람들의 행렬은 지난 200년간 90개국에서 이어졌다.

야라 강에서 가까운 멜버른 도심의 ‘빅토리아 이민박물관’. 1998년 낡은 세관 건물을 복원해 호주 빅토리아 주로 이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채운 이곳의 슬로건은 ‘우리의 다양성과 문화를 보라!’. 이민자들의 제2의 고향이 되기 위해 문화의 다양한 태피스트리들을 탐험하게 만드는 박물관에는 그들만의 이야기와 다채로운 축제가 새겨져 있다. 개성이나 다름을 반기고 추구하는 곳이 바로 호주라는 걸 알려주는 곳이다. 축제 정원에서는 음식·음악·문화가 살아 있는 즐거운 축제가 열리고, 각국의 이민자들을 기리는 보호구역이 바로 이민박물관이다.

상상의 체험공간으로 이루어진 로비는 이민자들의 출발점을 환기시켜 준다. 폐품을 활용해 각양각색의 비행기를 만들어 달아두게 한다. 자신을 낯선 땅으로 데리고 온 비행기를 추억하면서 이민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끔 하는 계산된 체험이다. 전시장 입구에 마련된 17m 높이의 복제된 이민선에 오르면 1840년대식으로 꾸며진 비좁은 3등 선실과 1900년대식 증기선의 호화로운 2등실, 그리고 1950년대식 원양여객선 객실 등을 비교하면서 수많은 이민자가 새로운 대륙에 대한 설렘을 안고 실려온 기나긴 항해를 체험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빅토리아 주로 이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인터랙티브 영상을 이용한 메모라빌리아를 통해 생생하게 재현된다. 관람객들은 영상을 보며 1800년대에 빅토리아 주로 이주, 오늘에 이른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꿈과 성공, 좌절에 공감하게 된다.

이 박물관 역시 다른 이민박물관처럼 ‘기억해야 할 과거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여행’을 경험하게 한다. 하지만 그 여행은 매우 특별한 인식과 체험을 제공한다. 멜버른 내 80여 개의 건물과 볼거리를 둘러보는 역사기행 ‘골든 마일 헤리티지 트레일’의 시작점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이민자의 그늘진 삶과 예감하지 않았던 환희가 한데 뒤섞여 있는 빅토리아 주의 다문화 역사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골든 마일 가이드는 뮤지엄 숍에서 구입할 수 있다).

왜 사람들은 태어난 나라를 떠나는가,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가,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가. 세상의 모든 이민박물관이 제기하는 질문이다. 제 나라를 떠나 살기로 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이 질문의 예리한 칼날을 비켜갈 수 없다. 이 박물관은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을 보여주고 들려주려 애쓰고 있는 것 같아 보는 이민자의 가슴 한 편에 못 박혀 있는 미안함과 그리움에 대한 위로가 되고 있었다.

▨ 멜버른 빅토리아 이민박물관 museumsvictoria.com.au/immigrationmuseum

◆ 문화의 다양성을 가르치는 ‘일본 해외이주 자료관’

하와이·아메리카 이주 일본인 디아스포라 역사
이민 1세대와 후손들 이야기, 새로운 삶의 이해
쌀밥과 타인종 음식의 모둠접시, 새 문화와 공존
수많은 기억, 또다른 이에게 시작될 시련의 이정표


20190222
하와이에 정착한 닛케이 대가족.
20190222
초기 이민자의 여행가방들.
20190222
이민자의 가족 생활. 모둠접시가 전시되어 있다.


20190222

일본국제협력기구(JICA)는 2002년 요코하마에 일본해외이주자료관(JOMM)을 세웠다. 19세기 후반 하와이를 포함해 남북 아메리카로 이주하는 많은 일본인의 주요 출항 항구가 요코하마였다. 닛케이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보여주는 이민박물관인 셈이다. 일본인에게는 해외이주의 역사를 전하고, 일본에서 생활하는 일본계 외국인들에게는 다문화사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일본인 해외이주 역사는 1866년 해외 도항을 금지하는 쇄국령 이후 약 150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을 중심으로 미국과 캐나다로 이주가 이루어졌고, 19세기 말 남미로 진출했다. 1924년 미국이 일본인의 입국을 금지하면서 많은 일본인이 남미로 옮겨가게 되었고, 제2차 대전 전후로 약 100만명이 이주했다.

전시관은 주제별로 꾸며져 주로 중남미와 하와이를 포함해 북미 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층층이 쌓인 낡은 이민가방과 망망대해의 사진을 지나면 노동자의 고된 현장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전시 타이틀 그대로 ‘toil in the soil(흙 속의 고군분투)’. 이민자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일본의 해외이주사를 제대로 알려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시실에서 만난 한 일본계 외국인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왜 이민을 와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정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중요한 삶의 선택이었음을 이제 알겠다”고 말했다. 이민자들이 직접 기증한 역사적인 유물은 물론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한 이민 1세대와 후손의 이야기를 직접 보고 들을 수 있게 꾸며져, 특히 젊은 일본인들에게도 소중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내가 흥미롭게 본 부분은 ‘이민자의 가족 생활’이라는 섹션이었다. 많은 관람객이 관심을 가진 건 다름 아닌 여러 음식이 함께 담겨있는 ‘모둠 접시(믹스플레이트)’. 다양하고 이국적인 음식이 흰 쌀밥과 함께 담겨 있는 모둠 접시는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던 일본인 이민자 1세대가 점심시간에 다른 인종의 동료들과 음식을 교환하거나 함께 먹던 데서 유래했다. 일본인의 주식인 흰 쌀밥이 다른 음식들과 함께 접시에 담겨 있는 모습은 자국 문화와 다른 문화의 공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민은 ‘삶의 다른 틀’이다

‘제 나라를 떠나는 것(emigration)’과 ‘다른 나라로 들어오는 것(immigration)’으로 구분되는 것이 이민(移民)인데, 대부분 ‘경험과 본질’에 주목하는 동양에서 ‘논리와 현상’에 주목하는 서양으로 ‘생각의 지도’를 옮겨 살게 되는 것을 말한다. 크로스컬처, 멀티컬처, 인터컬처. 어느 문화의 곁가지라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정체성이란 평등한 문화소통이 일어나는 공간에서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에 나는 무릎을 쳤다. 이민을 이야기할 때 세상 모든 이민의 이야기는 ‘성공신화’만 살아남게 되는 것 아닐까. 사람이 건너오고, 언어가 건너가고, 그것이 합쳐져 질곡의 시간을 지나며 새 터전에 뿌리내리게 되었지만 그간의 그리움, 아쉬움, 외로움의 시간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그 기억들은 이민박물관에 갇혀 다시 누군가에게서 시작될 시련의 이정표가 될 것임이 틀림없다. 이민은 ‘삶의 다른 틀’일 뿐이다. (대구교육박물관장)

▨ 요코하마 해외이주자료관 www.jica.go.jp/jomm

하늘에서 보면 태극문양이 선명한 ‘마음의 고향’

◆ 한국 이민사박물관

20190222
게일릭호를 탄 한국인 최초의 하와이 이민자 모습.



1902년 12월, 인천항에서 121명이 미국 증기선 게일릭호를 타고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간 것이 한국인 이민의 시작. 그 후 1907년까지 7천226명이 하와이로 떠났고, 1905년 1천33명이 멕시코행 이민선으로 도착한 유카탄 반도에서도 ‘애니깽’의 이민사는 계속된다.

100여년 전 이민선의 출항지였던 인천 월미도에 지하 1층~지상 3층 연면적 4천127㎡ 규모로 2008년 6월 개관. 2003년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우리 선조들의 해외에서의 개척자적인 삶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인천시민과 해외동포들이 함께 뜻을 모은 이곳은 ‘디아스포라의 귀향’부터 ‘기억할게, 우토로’까지 11회의 기획전을 통해 한국인 이민의 다양한 역사를 조명해왔다. 아시아, 미주, 유럽 등에 살고 있는 해외한인은 750만명. 최근의 난민사태를 계기로 불행하게 시작된 우리의 이민사에도 더 관심을 기울일 때가 됐다. 상설전시관 개편을 마치고 지난해 9월 재개관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