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애의 문화 담론] 커피역사 100년의 발자취

  • 김수영
  • |
  • 입력 2019-03-08   |  발행일 2019-03-08 제39면   |  수정 2019-05-01
황제가 반한 첫 가배, 모던보이가 반한 커피 ‘프랜차이즈에 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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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고종 어의가 美서 첫 들여와
러 공사관 피신 황제에 숭늉 대신 권유
밍밍한 맛 대신 쓴 맛 즐긴 ‘커피광’
동경유학파·문인 등 확산 대중 정착

광복후 정치인 조찬 모임 노른자 띄워
6·25전쟁 후 미군부대서 흘러나오기도
70년대 개발경제시대 대량 생산·공급
다방 커피 쇠퇴후 다양한 전문점 유혹
깊숙한 산골 절집까지 커피문화 확산


흔히들 일상에서 즐겨 마시는 커피 맛을 두고 “지옥처럼 검고 죽음처럼 강하며 사랑처럼 달콤하다”고 비유한다. 커피 원조 터키의 속담에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커피 원두의 원산지는 터키가 아닌 에티오피아 아비시니아 고원. 13세기 말엽 오스만제국(터키)의 식민지가 된 아비시니아 고원에서 한 양치기 소년이 방목 중이던 양 떼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붉은 열매만 따먹으면 흥분하여 뛰어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하여 자신도 호기심이 일어 붉은 열매를 먹어본 결과 신기하게도 힘이 솟고 정신이 맑아지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커피 원두가 세상에 드러난 효시(嚆矢)다.

이후 소년은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할 때마다 붉은 열매를 상복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점차 이슬람 신자들 사이에 알려지고 맑은 정신과 ‘힘의 원천’인 각성 효과가 알려지자 마침내 붉은 열매가 오스만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이 원두에 붙여진 이름이 이슬람 신자들의 머리에 두르는 두건 쿠피야(Kufiyyah)에서 따온 라틴어 카파(Cappa).

이 카파를 건조시킨 뒤 갈아서 피로 회복을 위한 음료로 개발한 것이 오늘날 커피의 원조가 되었고 이를 제조, 판매하는 최초의 카페가 이스탄불에 생겨났다. 카파는 다시 이집트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프랑스에서 카페(Cafe), 영국에선 코피(Coppee)로 변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기호품 커피의 전래 경로다.

커피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조 말엽인 1880년대 중반. 고종 황제의 어의(御醫)이던 알렌이 미국에서 들여와 대궐 안의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燒廚房)에서 직접 끓여 궁중의 대신과 궁녀들에게 맛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 커피는 요즘보다 진하고 쓴맛이어서 모두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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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은제(銀製) 커피잔

1895년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사무라이들을 대궐에 난입시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고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 오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아관파천(俄館播遷). 당시 독일인 통역관 앙투아네트 손탁이 수라상을 물린 황제에게 숭늉 대신 입가심으로 커피를 권한 것이 계기가 돼 고종이 밍밍한 숭늉을 멀리하고 쓴 커피를 즐겨 마시게 되었다. 고종 황제의 입맛을 돌게하고 커피광이 된 연유다.

예부터 우리네 식문화로 전래된 숭늉은 밥을 지은 솥에 물을 부어 데워 식후 입가심으로 누룽지에서 우러난 구수한 냄새를 풍기기도 하지만 그저 싱거운 물맛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당시 달리 마실 음료가 개발되지 않아 반상(班常)에 관계없이 숭늉이나 물로 입가심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후 한일합방이 되고 일제 강점기에 들어간 1919년 경성역(현 서울역) 2층에 양식당 그릴이 들어서고 식후 입가심으로 커피가 나왔다고 한다.

그 무렵 근대 서양문물에 적응해온 이른바 모던 보이들에 의해 커피 문화가 일반대중에 정착되기 시작했다. 당시 경성역 그릴은 커피광으로 알려진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이 걸려 있었고 주로 도쿄 유학파인 서양화가나 문인, 영화인들이 창작과 만남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8·15 광복 후엔 해방공간에서 건국을 앞두고 좌우이념 갈등이 격화되던 혼란기 정국안정을 위한 정치인들의 회합장소로도 이용되었으며 조찬 모임에는 날계란 노른자 한 개씩 띄운 모닝 커피가 인기를 끌었다고 했다.

6·25전쟁 이후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야전식량 C-레이션 박스에도 커피 봉지가 들어 있었으나 쓴맛 때문에 한국인들은 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개발경제시대에 들면서 국산 커피가 대량으로 생산, 공급되고 서민층에서도 부담없이 커피 한 잔씩 즐겨 마시는 다방 커피의 풍속도가 크게 번창했다. 한때 한가락씩한다는 이른바 지역 유지들이 즐겨 찾는 모닝 커피가 유행했고 홍차에 국산 위스키를 한 잔씩 타 마시는 이른바 위스키 티(tea)도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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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국의 커피 문화는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해 다방 커피가 점차 뒷골목으로 밀려나 ‘옛날 다방’으로 퇴락하는 대신 스타벅스, 커피빈, 바리스타 등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 전면에 나서 예술적 가치와 품격을 높여주는 값비싼 커피로 고객들을 유혹하게 되었다. 때문에 외부 활동이 잦은 직장인들은 하루에도 이 같은 커피를 보통 서너 잔, 많게는 네댓 잔씩 마시다가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굳이 뒷골목의 옛날 다방이나 커피 전문점을 찾지 않더라도 길거리 자판기에서 200∼500원씩 하는 종이컵 또는 캔 등 초저가 커피를 손쉽게 뽑아먹을 수 있을 만큼 이미 일반 대중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선지 “커피 한 잔 어때”라는 인사말이 쉽게 오가고, 심지어 녹차나 인삼차 등 전통 차를 마시며 다도(茶道)를 즐기던 깊숙한 산골 절집에까지 커피 문화가 파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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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인더만 있으면 어디서나 간편하게 원두를 갈아내릴 수 있어 한때 은은히 풍기던 선방(禪房)의 다향(茶香)마저 사라지고 있다. 때문에 젊은 시절 쌍화차나 오미자, 생강차 등 약차의 입맛에 길들여진 은퇴세대나 노후세대는 아직도 몇 군데 남아 있는 대구 약령시장의 약차집을 찾아 먼길을 오가기도 한다.

이 땅에 커피 문화가 도입된 지 100년. 옛 경성역 그릴은 서울시민과 여행객들의 문화공간인 ‘문화역 서울284’로 바뀌었다. 새해 들어서는 근대를 주제로 ‘커피사회전’을 열고 새롭게 만든 커피를 무료로 제공하며 커피 문화 100년을 기념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저성장, 저소득시대에 살아가기 힘들어진 서민층과 젊은이들 사이에 “커피 값부터 줄여야겠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평소 커피를 얼마나 많이 마셨으면 새삼 이런 말이 나올까. 커피가 그만큼 우리 속에 깊이 들어앉아있다는 말일 것이다.

대구미술협회 사무처장·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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