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로에서] 주부멸종시대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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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20   |  발행일 2019-03-20 제30면   |  수정 2019-03-20
맞벌이부부 절정 시대
배달·외식은 범람하고
살림하는 주부 사라져
집밥 사라진 주방이
주부멸종시대를 예고
[동대구로에서] 주부멸종시대
이춘호 주말섹션부 차장

주부(主婦). 한때 한민족 생명을 지키는 최전선이었다. 가족, 가정, 식구, 살림, 고향, 모정 등이 한몸으로 붙어다녔다. 밥상 책임자인 주부는 ‘식구(食口)’를 먹여살렸다. 그 과정이 바로 ‘살림’이다. 주부의 능력은 초인적이었다. 다들 한식·양식·중식·분식을 커버하는 셰프였다. 종부는 내림음식의 보루였다. 친정어머니는 시집가는 딸을 위해 요리부터 바느질까지 철두철미하게 준비해서 보냈다.

그 시절에는 두 개의 밥상이 있었다. 산 자의 밥상과 죽은 자의 밥상이다. 일상의 밥상은 여성(아내)의 몫. 남성(남편)은 망자를 위한 기제사용 제수를 책임졌다. 안살림과 바깥살림이 엄격하게 구별됐고 그게 선순환할 때 한 가문은 평화로울 수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구도가 어느 정도 유지됐다.

그 시절 여성의 종착역은 묻지마 ‘현모양처(賢母良妻)’였다. 자식에겐 현명한 어머니, 남편에겐 최고의 내조자여야만 했다. 대신 남편은 가족을 위해 목숨걸고 먹잇감을 제대로 구해와야만 했다. 남편이 시들하면 가정은 졸지에 지옥으로 추락해버린다. 다행히 그 시절에는 나라경제가 그런대로 잘 굴러가 취업도 잘되었고 무슨 장사를 해도 좀처럼 굶지 않았다. 주부가 가사에 더 집중할 수가 있었다.

이젠 아니다. 주부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중성(中性)’이 돼버렸다. 너무 편해져 집에서 요리할 필요가 사라졌다. 밥상은 더 이상 가정의 전유물이 아니다. 밥상은 이미 집 밖으로 가출해버렸다. 밥상은 이제‘식탁’으로 교체됐다. 아파트시대를 맞아 부엌도 ‘키친(Kitchen·주방)’으로 변해버렸다. 주부가 번거롭게 밥상차릴 필요도 없다. 식당, 배달음식, 할인매장, 식자재마트, 편의점, 홈쇼핑, 백화점 푸드코트 등이 책임진다. 천국 같은 세탁기·김치냉장고, 마법사 같은 전자레인지와 오븐이 주부를 주방에서 해방시켰다.

주부가 그렇게 된 건 세상 탓이다. 산업이 고도화될수록 더 먹고살기 힘들어졌다. 지원요청~. 남편이 수시로 SOS를 쳐댄다. 주부까지 직업전선으로 끌려나와야만 했다. 직장인이 된 주부들은 밥상차릴 겨를이 없다. 아니, 차릴 수는 있다. 하지만 차리는 것 자체가 더 낭비고 비효율적인 세상이 돼버렸다. 설상가상 때맞춰 먹어줄 식구도 없다. 남편은 툭하면 회식, 아이는 빵만 먹는둥 마는둥, 그리곤 이내 등교한다. 점심은 묻지마 학교급식, 저녁은 학원 가기 전 편의점에서 해결한다. 주말에는 다들 피곤해 늦잠판. 주부는 개점휴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아이들은 부모의 식성조차 알지 못하고 존중도 하지 않는다. ‘밥상정담’이 사라진다. 자연 가족애도 데면데면하다. 아이는 수시로 간첩 접선하듯 ‘폰질’하며 제 혀에 맞는 별별 신메뉴를 배달시킨다. 이제 ‘요리=클릭’이다. 어느새 ‘가정간편식(HMR)’ 특수가 밥상을 고사시켜 버린다. 급기야 집과 멀어진 청년백수는 집밥을 잃고 감옥 같은 ‘혼밥’ 속으로 잠행한다. 세상은 휘황찬란한데 주방은 휑뎅그렁하다.

주부가 사라진 주방. 각자도생하는 식구들. 오프라인 가족은 멀어지고 인터넷이 맺어준 ‘온라인가족’한테 더 위안을 받는다. 가족이 소외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 고독한 패밀리의 틈을 비집고 슈퍼갑으로 등극한 놈이 바로 ‘반려견’이다.

주부멸종시대는 반려견만을 위한 ‘펫토피아(Pettopia)’로 자꾸 기울고 있다. 살맛난 건 반려견. 반려견만을 위한 주방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훗날 국어사전은 주부를 ‘반려견을 위해 요리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할지 모르겠다.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채지만 다들 이 난감한 아이러니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한다. 그냥 떠내려갈 뿐이다.

예전에는 집은 밥을 낳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집은 잠자는 곳이다. 세상의 모든 감각이 집 밖으로 쓸려나가고 있다.

주부? 그 단어를 언급하는 것조차 ‘미투’ 대상이 될 정도로 지금 우린 실종이 아니라 ‘주부멸종시대’를 살고 있다.
이춘호 주말섹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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