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금수회의록

  • 원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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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23   |  발행일 2019-03-23 제23면   |  수정 2019-03-23

우리는 흔히 잔인하거나 야만적인 인간을 비하하고 경멸할 때 ‘그 짐승만도 못한…’이라는 표현을 한다. 이 때 짐승은 날짐승(禽)과 길짐승(獸)을 망라한 금수(禽獸)로 통칭된다. 금수보다 못한 인간이라니…. 동물 중 개의 자식에 비유된 욕설보다 더 강도 높은 질타다. 결코 들어서는 안 될 치욕이다.

1908년 출간된 우화 신소설인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은 8가지 동물과 관련된 풍자·비유로 유명하다. 까마귀·여우·개구리·벌·게·파리·호랑이·원앙이 등장한다. 날짐승·길짐승은 물론, 바다 속 생물과 곤충까지 나온다. 이들 모두 인간의 나쁜 속성과 잘못된 처신을 비판하고 경계하는 데 동원됐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군림하는 인간의 간사함을 지적하는 ‘호가호위(狐假虎威)’는 너무 자주 인용돼 식상할 정도다. 우리 주변에 이런 스타일의 인간이 많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입에 꿀을 머금고 뱃속에 칼을 숨기고 있다는 뜻의 ‘구밀복검(口蜜腹劍)’도 마찬가지다. 경쟁이 치열한 현대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해 약빠르게 처신하는 인간상을 비판한다. ‘반포지효(反哺之孝)’는 인간의 불효에 대한 경각심을 안겨준다. 반포는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도리어 늙은 어미를 먹이는 효도를 뜻하는 말이다. 까마귀를 달리 반포조(反哺鳥) 라고 부르는 이유다. 요즘 속속 들어서 성업하는 요양원들은 나이 많은 부모를 모시기가 그만큼 어려워지고 있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정와어해(井蛙語海)’는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를 말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물 속 개구리처럼 소견이 좁은 인간이 아는 척하고, 분수를 모르고 행동하는 일을 꼬집는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는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사납다는 뜻이다. 국민 민생보다는 당리당략과 입신양명만을 좇는 한국의 그릇된 정치 상황에 딱 어울리는 단어다.

창자(줏대나 기준)가 없는 공자를 뜻하는 ‘무장공자(無腸公子)’, 파리가 여기저기 왕래하며 악착같이 이익을 추구하는 모양을 그린 ‘영영지극(營營之極)’도 인간세상에서의 처절한 처신을 잘 빗댔다. 불건전한 남녀 관계와 음란함을 비판하는 ‘쌍거쌍래(雙去雙來)’는 다소 생소한 어휘다. 항상 붙어 다니는 원앙의 모습을 비유해 역설적으로 부부간 윤리와 애정을 강조한다. 하지만 각종 시험에 출제 빈도가 높은 고급어휘다. 원도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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