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정의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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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23   |  발행일 2019-03-23 제23면   |  수정 2019-03-23
[토요단상] 정의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최환석 맑은샘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수년 전에 한 방송국에서 일하던 여성 작가가 진료를 받으러 왔다. 계약직으로 있으면서 고강도의 업무를 해치우느라 몸과 마음이 다 지쳐 있었다. 우울증과 수면장애로 수개월간 치료를 받으면서 그녀가 했던 일에 대해서도 간간이 들을 수 있었는데, 나로서는 놀라운 방송 뒷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이야기의 요지는 아무리 자연스러워 보이는 장면이라도 자신들이 쓰는 대본대로 하는 것이라며 예능프로그램의 이미지를 다 믿지 말라는 뜻이었다. 물론 다소 과장된 면도 없지 않겠으나, 이후에 쏟아지는 관찰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 말도 일견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자면, 마치 우연히 들르는 장소처럼 보이지만 구석구석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를 보면 이들이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물론 재미로 보는 예능프로에서 누가 관찰자 시점으로 세팅된 카메라를 파악하고 객관적인 시점으로 시선을 돌리고 싶어 하겠는가. 그냥 웃고 즐기면 그만이지. 조금 더 뇌과학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객관적인 시점에서 카메라와 출연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다. 이런 곳에다 에너지를 쓰기보다 우리 뇌는 더 편하고 빠른 ‘지름길’을 선택한다. 그냥 카메라가 보여주는 대로 자신이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섬뜩한 느낌이 들면서 무언가와 아주 비슷하다. 세뇌의 원리 말이다. 세뇌는 간단하게 말해서 뇌에 지름길을 뚫어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어떤 믿음을 가지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예능프로를 보면서 웃고 즐기다보면, 출연자들의 사생활을 엿보고 있다고 느끼고 저것이 그들의 진짜 모습이라고 믿게 된다. 그래서 일부 연예인에게는 자신의 어두운 면을 숨기면서 성실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세탁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그 위선이 벗겨질 때 우리는 믿음을 준 것에 대한 배신감을 느낀다. 배신에 대한 본능적인 분노의 크기는 생각보다 크다. 또한 분노는 시야를 좁게 만들어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거나 다른 면을 보기 힘들게 만든다. 그래서 대중은 연예인 사건이 터지면 그 사건에서 눈을 떼기 힘들어진다. 물론 이슈가 되고 있는 작금의 사태는 분명히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며, 잘못이 있다면 일벌백계해야 다른 잠재적 범죄자들의 범죄욕구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일부 권력자가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날라치면 번번이 연예인 사건을 고의적으로 터트렸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대중을 분노하게 만들어 놓고 시선을 돌려놓은 뒤, 자신은 그 사건 뒤에 숨어서 권력과 언론의 씨실·날실을 이용해 무마했을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의혹을 가지는 사람이 많이 있다.

다행히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8일 김학의·장자연·버닝썬 사건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라는 메시지를 직접 전달했다. 이는 검찰과 경찰이 명운을 걸고 재조사를 하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우리 국민이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고 이 사건들이 어떻게 규명되어 가는지 끝까지 관심을 가져달라는 당부이기도 하다. 그러자 종결시점이 임박해있던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짧은 2개월이기는 하지만 5번째 기간연장이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어렵게 시작된 일이므로 의혹이 규명될 때까지 끝까지 조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왜 기간 연장을 어렵게 얻어내야 하는지, 그리고 그때마다 첨예하게 갈등을 일으켜야 하는지 정말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통령의 메시지 전달 직후 숨통을 트여놓았으니 이제는 기다려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혹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반드시 풀려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결과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어야 수사의 종결이 의미 있어진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정의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다섯 번을 연장해서 안 되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연장해서라도 수사를 해야 할 것이며, 동영상의 인물이 누군지 잘 못 알아보겠다면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확인하면 된다. 우리 뇌는 커다란 패턴기계임을 잊지 마라. 아무리 희미해보여도 중요한 패턴만 포착되면 누군지 금방 알아차리는 게 우리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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