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寺미학 .2] 막존지해(莫存知解) 주련...이기심·편협함 버리라는 글귀, 마음의 문에 걸어두고 새겼으면…

  • 김봉규
  • |
  • 입력 2019-04-04 08:09  |  수정 2021-07-06 10:35  |  발행일 2019-04-04 제22면
20190404
20190404
‘입차문내막존지해(入此門內莫存知解)’라는 글귀의 주련이 걸려 있는 부산 범어사의 불이문(위쪽)과 같은 글귀가 돌기둥에 새겨져 있는 구례 화엄사 부속암자 연기암 입구.

요즘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경험하곤 한다. 알고 지내던 주변 사람들의 달라진 생각이나 언행들이다. 직접 이야기하는 것을 듣거나 SNS를 통해 보게 되면서 겪는 일인데, 그 내용이 점점 극단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정치적 현안을 비롯한 사회적 관심사에 대한 주장들을 접하다 보면, 건성으로도 동조하기가 쉽지 않아 난감해지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사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고, 자신있게 내 생각이 옳다고 말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짐을 깨닫게 되니 더욱 그렇다. 나이가 들면 겸손해지고 지혜가 생기며 아량도 늘어난다고 한다. 반대로 고집이 강해지고 자신의 경험이나 가치관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고 하기도 한다. 다 맞는 말일 것이다. 전자인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이 더 살 만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고, 후자가 많으면 그 반대일 것이다. 인간사 불행한 일의 대부분은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적 분별심이나 편협한 가치관에서 비롯된다.

◆사찰 입구에 걸린 ‘모든 지식이나 분별심 버려라’는 글귀

우리나라 최고의 참선수행 도량(사찰)인 문경 봉암사의 태고선원에 들어가는 문의 이름이 진공문(眞空門)이다. 이 문의 양쪽 기둥에 ‘입차문내막존지해(入此門內莫存知解)’라는 글귀를 네 자씩 나눠 새긴 주련이 걸려 있다.

‘이 문 안에 들어서면 모든 알음알이를 버려라’는 의미다. 세속에서 가졌던 기존의 모든 지식이나 고정관념, 분별심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진리의 세계, 깨달음의 경지에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 범어사에는 일주문(一柱門)과 천왕문(天王門)을 지나면 나타나는 불이문(不二門)에 이 주련이 걸려있다. 이 불이문에는 왼쪽 기둥에 ‘입차문내막존지해’가 걸려 있고, 오른쪽 기둥에는 ‘신광불매만고휘유(神光不昧萬古輝猷)’라는 글귀의 주련이 걸려 있다. 글씨는 범어사 조실로 오랫동안 주석한 현대의 대선사 동산 스님(1890~1965)이 썼다. 오른쪽 주련 글귀는 ‘밝고 신령스러운 빛이 영원히 빛나다’라는 의미다.


참선수행 도량으로 드는 문 기둥에
‘입차문내막존지해’ 선가귀감 구절
세속의 모든 알음알이 없애고 나면
깨달음에 다가설 수 있다는 가르침

정치인·지도자들 극단으로 치달아
우리사회에 지혜로운 언행 못 보여
靑·국회 등 권력기관에도 내걸려야


이처럼 산사에 가면 그 초입에서 이런 글귀를 만나게 된다. 사찰 입구의 돌 기둥에 새긴 경우도 있고, 일주문이나 불이문에 걸려 있기도 하다. 태고선원처럼 선원(禪院) 입구에 걸려 있는 경우도 있다. 구례 화엄사 부속암자인 연기암에는 입구 돌기둥에 새겨져 있고, 문경 용문사와 하동 쌍계사 등은 일주문에 걸려있다.

‘입차문내막존지해’와 짝을 이루는 글귀로 ‘신광불매만고휘유’ 대신 ‘무해공기대도성만(無解空器大道成滿)’이 걸려있는 경우도 있다. 쌍계사와 용문사의 일주문에는 이 글귀가 걸려 있다. ‘알음알이가 없는 빈 그릇이라야 큰 도를 이룬다’는 의미다.

‘신광불매만고휘유/입차문래막존지해’ 글귀는 중국 원나라 승려 중봉 명본(中峯 明本: 1238~1295)의 글이라고 한다. 서산대사(청허 휴정)가 참선수행에 요긴한 지침을 엮은 ‘선가귀감(禪家龜鑑)’의 마지막 글귀도 이것이다.

세속의 지식과 정보들이라고 할 수 있는 알음알이는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데 무엇보다 큰 장애가 되기 때문에 이렇게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만고에 빛나는 밝고 신령한 광명, 불생불멸의 본래 자리는 모든 지식이나 사상, 그것에 바탕한 분별심을 떠난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가귀감 첫 구절은 이렇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을 지을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有一物於此 從本以來 昭昭靈靈 不曾生不曾滅 名不得狀不得).’

◆모두에게 필요한 가르침

어린 시절의 시골생활 기억을 떠올리면, 당시에는 노인들 대부분이 너그럽고 지혜로운 언행을 보여주었다.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언론을 통해 접하는 우리 사회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은 더욱 그렇다. 열린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사안의 본질을 제대로 보고 바람직한 해법을 이야기하는 어른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몸은 점점 딱딱해져도 마음은 더욱 부드러워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욱 열린 마음이 되고, 겸손하고 지혜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이 듦의 값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몸처럼 마음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굳어져버린다면, 어른은 오히려 사회의 골칫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지도자들이 그러면 사회는 더욱 각박해지고 갈수록 극단으로 치달을 것이다. 가정이나 조직, 국가나 지구촌 모두 마찬가지다.

탈무드의 전설에 따르면 처음에는 인간에게 노화의 흔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신에게 나이가 들면 용모를 보고 구별할 수 있게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다. 한 세대와 그 다음 세대를 구별하기 힘들면 누가 경험과 지혜가 더 많은지를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늙는 것은 지혜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종교 전쟁이나 마녀사냥, 나치의 만행, 전쟁과 테러 등 인류의 대표적 불행의 역사는 모두 어느 종교, 사상, 문화, 민족 등의 편협한 가치관이나 분별심, 이기주의가 원인이다. 우리나라의 불행한 현실과 지난 역사도 그렇다.

고집이나 편견을 점점 없애가야 함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인데, 개인이나 사회가 점점 그 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부처가 되고 신선이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 삶이 행복하기 위해서라도 ‘막존지해’가 절실하다.

자신의 지식이나 가치관이 틀릴 수 있고 편견일 수 있다는 생각, 인간이 지구촌이나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절실하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 문명의 지배가 가속화할 앞으로의 인간사회는 이 같은 인식이 더욱 절실한 시대가 될 것이 분명하다.

‘막존지해’ 글귀는 사찰이나 선원 입구 문에만 걸릴 게 아닌 것 같다.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권력기관의 문에도 걸려야 될 듯하다. 국회, 검찰청, 대법원, 청와대, 그리고 미국 백악관, 중국 주석궁, 유엔 등에도. 걸어놓기만 하면 별 효과가 없을 터이니, 반드시 매일 읽고 마음에 새기게 할 수 없을까 하는 백일몽을 꿔본다. 어떻든 나이가 들수록 ‘막존지해’ 방향으로 나아가야 마음이 점점 부드러워질 것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자 이미지

김봉규 기자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