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성인의 찌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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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15 07:55  |  수정 2019-04-15 07:55  |  발행일 2019-04-15 제17면

제나라 환공(桓公)이 어느 날 책을 읽고 있었다. 뜰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던 윤편(輪扁)이 환공에게 물었다. “전하께서 읽고 있는 책은 무슨 책입니까?” 환공이 대답하였다. “성인의 말씀이네.” “성인이 살아계십니까?” 환공이 대답하였다. “벌써 돌아가셨다네.” “그럼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 사람(古人)의 찌꺼기군요.” 환공이 화가 나서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목수 따위가 어찌 시비를 건단 말이냐. 이치에 닿는 설명을 하지 못한다면 죽이겠다.” 윤편이 대답하였다. “제 경험으로 보건대 수레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적절하게 깎는 일은 손짐작으로 터득하여 마음으로 수긍할 뿐 입으로는 말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비결이 있지만 제가 제 자식에게도 깨우쳐줄 수 없습니다. 옛 사람도 그 전해줄 수 없는 것과 함께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 사람의 찌꺼기(糟魄)일 뿐입니다.”

윤편의 말과 같이 도(道)는 형체나 색깔, 이름과 음성으로는 묘사할 수 없다. 그러니 도의 참모습은 결코 남에게 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참으로 도를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知者不言) 말로 도를 설명하는 자는 도를 알지 못한다(言者不知).

장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옳고 그름, 즉 시비를 따지는 우리의 마음은 궁극적으로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였다. 장자는 이 규칙을 ‘형성되어 굳어진 마음’, 즉 ‘성심(成心)’이라고 불렀다.

대저 성심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그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반드시 마음의 변화를 알아 마음에 스스로 깨닫는 현자라야 성심이 있겠는가. 우매한 보통사람도 이런 사람과 마찬가지로 성심을 가지고 있다. 성심이 없는데 시비의 판단이 생긴다 함은 오늘 월나라를 떠나 어제 거기에 도착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며,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셈이 된다.

성심은 우리가 태어나면서 접하는 모든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 물론 성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언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를 뿐”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언어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따라야 할 대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언어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 즉 성심을 형성하고 그 성심으로 말미암아 온갖 분별과 시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라와 가족과 언어를 선택한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누구도 성심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도는 성심을 벗어난 곳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전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를 체득한 자는 도를 전달해야 할 책무가 있고, 또 도를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말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경전이 성인의 찌꺼기인 줄 알지만, 우리가 도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찌꺼기를 통해서인 걸 어쩌랴.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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