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헌법재판관이 지켜야 할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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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17   |  발행일 2019-04-17 제31면   |  수정 2019-04-17
[영남시론] 헌법재판관이 지켜야 할 예의

전관 출신의 변호사를 남편으로 둔 현직 판사의 재산이 40억원 정도이면 그 재산규모가 보통 사람의 상식선을 넘어설 정도로 많은 수준인가. 지방의 월급쟁이 의사로 반평생을 살다가 이제 명예로운 퇴각을 준비해야 하는 내 처지에는 참 부러운 수준이긴 하지만, 양극화된 한국사회의 실정에서 보면 결코 많은 재산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 해에 수십억원씩 벌어들이는 전관 변호사가 수두룩하고, 밤새도록 태양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클럽에서 하룻밤에 기천만원에서 억대의 술값을 현금으로 쓸 수 있는 청년과 그 청년의 부모들이 보기에 겨우 40억원의 재산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중년 법관 부부가 측은해 보일 수도 있을 게다.

문제는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는 재산의 대부분이 주식이라는 건데,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 주식투자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다만 본업과 부업이 헛갈릴 정도로 주식투자에 몰입한 것과, 일반 투자자들이 접근할 수 없는 내부정보를 이용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만드는 투자행태가 시빗거리를 제공한 셈이다. 이 때문에 애초 이미선 판사의 이념 편향성을 문제 삼던 야당의 태도가 돌변하는 바람에, 그가 헌법재판관이 되었을 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 사회의 공동체 문화를 규율하는 가치관의 지평이 얼마나 넓어질 것인가에 대한 답은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다.

법조계의 비주류(여성·40대·지방대 출신)라는 조건 때문에 후보로 발탁이 되었을 이 판사가 청문회에서, 그리고 그 이후 보여준 언행도 비주류의 참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편이 한 일’이어서 자신은 전혀 몰랐다는 해명은 ‘실무자들이 한 일’이어서 자신은 전혀 몰랐다는 정치인의 변명과 절묘하게 겹친다. 교육감 선거홍보물에 선거법에 금지된 정당표기를 한 것은 실무자들이 한 일로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강은희 대구시 교육감의 일관된 주장이다. 이 재판을 이 판사가 맡았으면 어떤 결론을 내릴까. 헌법재판관이 되면 부부가 가진 주식을 모두 처분한다고도 했지만 이 또한 오래 전부터 신종 매관매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처신이다.

청문회가 시작된 이래로 민낯을 드러낸 공직자들의 수준과 관례에 비추어 볼 때 이 판사가 헌법재판관에 오르지 못할 이유는 딱히 없는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헌법재판관이 된다 하더라도 국민이 기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방대학 출신의 여성 판사들에게는 희망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국민과는 무관한 그들만의 희망일 뿐이다. 전 재산이나 다를 바 없는 주식을 모두 처분해서라도 굳이 헌법재판관 자리에 오르려 하는 이유가 자신의 명예회복이라는 사사로운 목적이라면 더욱 참담한 일이다.

헌법재판관이 되려는 법관들은 그 자리가 1987년 유월항쟁의 산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 아홉 자리를 만드는 데 법관들이 무슨 기여를 했던가. 헌법재판소의 존재는 부도덕한 독재권력에 부역했던 사법부의 치욕스러운 역사와 맞닿아 있다. 헌법재판관들은 자신이 앉아 있는 그 자리 밑으로 사법살인으로 희생된 인혁당 열사들, 그리고 수많은 박종철, 이한열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 자리는 정치권의 전리품이 아니며 법관들의 승진과 출세의 도구가 아니란 말이다.

우리나라 사법부의 신뢰도는 묻기조차 민망한 수준이다. 국민이 세워놓은 사법부 독립이라는 바리케이드 뒤에서 전관예우와 재판거래를 일삼던 법비들만 배를 불리고, 국민은 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현실을 현직판사였던 헌법재판관 후보가 모를 리는 없을 터. 이미선 판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주식을 처분한다는 식의, 진부한 방식으로 자리를 흥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국민의 일상에 어떻게 반영시킬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분명하게 밝히는 일이다. 그것은 헌법재판관 후보로서 그 자리를 만들어 준 국민에게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다.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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