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학의 박물관에서 무릎을 치다] 흙·씨앗·생명…더 멋진 미래세상 싹틔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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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19   |  발행일 2019-04-19 제38면   |  수정 2019-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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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토종씨앗박물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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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씨앗나눔’에 참여한 씨앗도서관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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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완식 박사 기증관.

봄이면 회자되는 명시 ‘황무지’에서 T. S. 엘리엇은 겨우내 죽은 듯한 대지를 뚫고 수수꽃다리(라일락) 싹이 돋아나는 경이로움을 보고 ‘4월은 잔인한 달’이라 노래했다. 씨앗의 힘과 그걸 살피는 농사의 힘. 인류의 가장 큰 발명은 단연코 농사다. 농사를 통해 인간은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고 거기서 얻은 생산물 덕분에 혹독한 겨울을 견뎌낼 수 있었다. 오늘은 두 박물관을 통해 우리의 미래인 토종씨앗과 먹을거리를 만드는 문명의 기초, 농업이야기를 전한다. 지속가능한 문명의 돌파구는 여기에 매달려 있는 것 아닐까.

충남 예산군 ‘한국토종씨앗박물관’
토종·씨앗 정신적 가치, 1500여종 빼곡
선구자 안완식 박사 연구 자료·사진전
사고파는 물건이 아닌‘나눔’에서 시작
우리땅서 나고자란 ‘씨앗주권’의미 새겨


충남 예산군 대술면. 참 햇볕이 곱고, 바람이 순한 곳이다. 이런 소담한 농촌마을에 한국 최초의 토종씨앗박물관이 있다. ‘토종을 살려보겠다’는 오기 반, ‘씨앗을 베고 죽겠다’는 각오 반으로 만든 그야말로 ‘토종 무지렁이’ 박물관, 씨앗을 공공재인 국가유물로 등록한 대한민국 유일의 박물관이 탄생한 것이다.

2017년 문을 연 115.5㎡(35평) 남짓의 작은 박물관에는 1천500여 종의 토종씨앗이 맵시 있게 빼곡히 들어 앉아 있다. 처음부터 박물관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4년 전 강희진 관장의 부인 김영숙씨(슬로푸드 전문가)가 토종씨앗에 대한 관심으로 공부를 시작해 ‘육종도 중요하지만 보존도 중요하다’는 사실에 눈뜨면서 박물관을 생각하게 되었다. 부부는 단 한두 종만을 위해서라도 전국을 누볐고, 그들의 발자국 소리에 눈뜬 생명을 만나면서 ‘역사성’에 주목하게 됐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채종과 씨앗마실을 통해 모은 예산의 토종씨앗들이 먼저 관람객을 맞는다. 전시실 중앙은 수수한 카페처럼 꾸며져 체험교육공간으로 쓰인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날이면 토종과 씨앗의 정신적 가치를 배우는 형형한 눈빛들이 가득 차게 되는 곳이다. 그 옆 방은 우리나라 토종의 산증인이요, 선구자인 안완식 박사가 ‘씨앗의 역사성을 기록해야 한다’는 박물관의 취지에 공감해 기증한 씨앗들과 연구자료, 사진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지난달 30일 그곳에서 ‘토종씨앗나눔’ 행사가 열렸다. 원래 씨앗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라 서로 나누는 것이므로, 그야말로 ‘토종은 미래의 가치, 한국 토종씨앗박물관은 그 미래의 시작’이라는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박물관에 모여 토종씨앗이야기를 나누며 멋진 세상을 움틔우려는 ‘길 위의 인문학’ 행사였다.

사실 씨앗박물관의 해설 패널은 인문학 강의실이나 다름 없었다. 씨앗이 이토록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어느 누가 이렇게 찬찬히 일러줄까 싶을 정도다. 전시실벽에는 맨 먼저 인도말 ‘브리히’(가을에 익는 벼)가 여진말 ‘베레’(흰 쌀)가 되고 마침내 ‘벼’가 되었다는 것, 인도말 ‘사리’(겨울에 익는 벼)가 ‘쌀’이 되었다는 얘기로 우리 주식(主食)의 어원을 알게 한다. 메밀로 소설가 이효석을 이야기하고, 감자로 신경숙의 소설과 고흐의 대표작을 떠올리게 한다. 콩은 추사 김정희, 녹두는 녹두장군 전봉준, 무는 허균, 수박은 소설가 황순원의 작품과 연결시킨다. ‘신숙주의 지조 없음’이 녹두나물의 별명으로 굳어졌다는 설명과 함께 호밀빵이 독립투사들의 눈물 젖은 끼니였다는 설명도 감동적이었다. ‘구황작물’ 감자를 인구의 4분의 3이 굶어죽은 아일랜드의 비극과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감자의 제주어)로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씨앗박물관의 당당한 존재감을 느꼈다. ‘씨앗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다’는 사실을 찬찬히 일러주며, 맹목적 믿음으로 ‘토종’을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지금 세계는 씨앗전쟁 중이다. 세계적으로 보면 하루에 70여 종의 종자가 사라진다. ‘농업생물다양성의 교두보’인 토종씨앗을 외면하고 씨앗주권을 지키지 못한 대가는 생각 이상으로 혹독하리라. “토종씨앗박물관이 나라를 지키는 독립군은 아니지만, 우리가 우리 땅에서 먹고 자란 씨알의 역사를 간직한 씨앗 수문장은 될 거”라는 강희진 관장의 말에 경의를 보낸다.

토종씨앗 한 알 한 알마다 화장세계(華藏世界)가 들어 있다. 나는 그렇게 공들여 모은 씨앗들을 귀하게 여기는 그곳을 ‘될 성 부른’ 박물관, ‘뿌린 대로 거둘’ 박물관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 한국토종씨앗박물관 www.토종씨앗.com (blog.naver.com/fsac)

캐나다 오타와 ‘농업 식품박물관’
재생에너지 기술·농기계·가정식 요리
젖소짜기·메이플 사탕 잊지못할 추억
도심 속 전형적인 농경생활 체험 만끽
농업 통해 ‘창의적 재능’펼치고 일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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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를 타고 실험농장을 둘러보는 방문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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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터 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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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농업식품박물관 전경.
오타와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 명문 칼튼대학교와 다우스호수를 끼고 돌면 캐나다 농업 식품 박물관(Canada Agriculture and Food Museum)이 있다. 시골정취를 느낄 수 있는 도심 속의 체험농장으로 인기 높은 캐나다 농업식품박물관은 1886년에 설립된 ‘캐나다중앙실험농장’, 1889년에 개장한 ‘도미니언 수목원’과 함께 있다. 엄청난 규모다.

독특한 농업유산과 전형적인 농경생활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이곳에서는 다양한 전시 외에도 말, 젖소, 양, 돼지, 토끼 등을 직접 볼 수 있다. 관람객이 가축을 만지거나 먹이를 주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멋진 체험 프로그램이 있어서 그 누구도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다. 야외의 에너지 파크에서는 태양·풍력·수력 에너지 등의 원리를 배우고, 재생에너지 기술이 캐나다 농업의 에너지 소비와 생산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도 가르쳐준다. 낙농 관련 건물에서는 벌(bee)과 관련된 전시, 트랙터 등 농기계 전시, 그리고 요리와 관련된 체험이 이뤄지는 곳이다. 여왕벌을 찾아보는 재미뿐만 아니라 꿀을 만드는 과정 등도 배울 수 있고 버터·쿠키·밀가루 만들기 등 농업과 식품에 관련된 수업을 한다. 지식을 배우고, 그것을 활용하여 요리하는 수업을 아이들이 흥미로워하는 건 당연지사. 함께 온 어른들에게 캐나다 가정요리법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평도 듣고 있다.

50마리가 넘는 젖소들이 모여 있어 젖을 짜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우유 만드는 과정을 설명해 주는 투어에 참여할 수도 있다. 쇠빗으로 양털을 빗는 체험은 덤이다. 러닝센터에서는 터치스크린 등 다양한 영상 매체를 통해 아이들이 쉽고 즐겁게 배울 수 있는 콘텐츠가 마련되어 있다. 현대 농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기 위해 일하는 농장 같은 박물관. 헛간에서 농업과 환경을 둘러싼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배우고, 다양하고 창의적인 체험활동에 참여한다.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에 있을까. 특히 3~4월 메이플 시럽을 만드는 시즌이 되면 메이플 시럽을 끓여서 깨끗한 눈 위에 부어 빠르게 응고되는 순간에 막대기로 돌돌 말아 사탕 형태로 만드는 메이플 태피 또한 잊을 수 없는 체험이다. 부활절에는 에그 헌팅, 여름에는 아이스크림 축제, 추수감사절에는 애플 사이다 만들기, 핼러윈 때는 호박으로 잭-오-랜턴 만들기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주말이면 마차를 타고 박물관 옆의 대형농장을 둘러보는 여유도 부려볼 만하다.

2017년부터는 이 박물관에 오타와에 있는 다른 두 곳의 박물관(과학기술박물관, 항공우주박물관)을 더해 ‘창의적 재능’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인제니움(Ingenium)’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티켓을 판매하고 있다. ‘인제니움’은 과학과 기술 유산에 대한 캐나다의 이야기를 보존하고 공유하기 위해 만든 새로운 브랜드. 연간 회원권으로 캐나다 전역과 전 세계에 분포하는 300여 개의 과학기술박물관과 과학센터를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과천 국립과학관도 물론 포함된다.

최근 중국이 캐나다산 카놀라의 수입을 금지하면서 초비상이 걸릴 정도로 유명세를 탄 카놀라. 지금 이 박물관에서는 ‘카놀라 이니셔티브 국가자문위(CINAC)’가 참여하여 엄청난 연구와 도전의 역사가 펼쳐진 전시회로 평가받은 ‘캐나다가 개발한 혁신의 씨앗, 카놀라 50주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오는 12월5일 세계토양의 날을 기념해 준비 중인 ‘토양’에 관한 전시회도 마음이 끌린다.

(대구교육박물관장)
사진: 김선국(사진가)

▨ 캐나다 농업식품박물관 www.ingeniumcanada.org/agriculture/index.php

어지간한 감동도, 세상을 떠나갈 듯한 사건도,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도 금세 잊히는 세상에서 우리의 생명을 아끼고, 미래를 담보하고 있다는 오늘의 작은 믿음이 많은 이들 가슴에 오랫동안 남았으면 좋겠다. 사찰에서 수행자들이 식사를 할 때마다 염송하는 ‘오관게(五觀偈)’라는 게송(偈頌)이 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다네/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생각하여/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 평소에는 그 뜻이 무심하기 그지없었지만 며칠 동안 씨앗, 생명, 흙 그리고 애쓴 이의 마음을 생각해서 그런지 평소와는 달리 더욱 절절하게 와닿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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