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회장님과 할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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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20   |  발행일 2019-04-20 제23면   |  수정 2019-04-20
[토요단상] 회장님과 할담비
최환석 맑은샘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이 얼마 전에 별세했다. 그가 생전에 항공업과 해운업에 기여한 바가 컸으므로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그의 인생과 가족사를 생각하자면 안타까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한진그룹 창업자 고(故) 조중훈 회장이 별세하면서 그룹을 쪼개 네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곧이어 ‘형제의 난’이라고 불리는 다툼이 시작되었다. 서로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수년간 법적분쟁을 벌이면서 고통이 누적되었다. 더 큰 문제는 조양호 회장의 직계가족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소위 ‘땅콩회항’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시작으로 가족들에 의한 연이은 갑질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면서, 대한항공 내부에 숨어있던 수많은 경영비리가 터져나왔다. 결국은 올해 3월에 있었던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회장은 경영권을 박탈당하고 만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상상의 영역이지만 막대한 재산과 권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과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그 이유는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수행한 한 실험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카너먼 교수팀은 대장내시경을 받는 환자를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한 그룹에게는 평균 8분가량의 대장내시경 검사가 끝나자마자 내시경을 제거하게 했다. 이들은 8분간 고통스러운 검사를 받았지만 고통의 순간은 급작스럽게 끝났다. 다른 그룹에게는 대장내시경 검사가 끝난 후에도 내시경을 제거하지 않고 한동안 놔두었다가 제거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긴 24분간이나 검사를 받았지만 고통은 점점 완화시킨 후 내시경을 제거한 것이다. 그런데 검사를 마치고 1시간이 지난 후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리고 다시 검사를 받을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을 때, 놀랍게도 더 오랜 검사를 받은 집단의 환자들이 훨씬 덜 고통스럽게 기억하면서 재검사에 대한 의향의 비율도 높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실험은 우리의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보여주기 위함이지만, 결국 끝이 좋아야 전체도 좋게 받아들인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조 회장과 정반대 지점에 있는 한분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전국노래자랑에 나와 손담비의 ‘미쳤어’를 나름의 율동을 곁들여 불러 화제가 되었던 지병수씨다. 처음 동영상을 보았을 때 물론 재미있고 웃겼지만, 어쩐지 한 노인이 그냥 아이돌 노래를 따라 부르는 주책스러운 느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는 단순한 재미를 넘어 어떤 감동을 느꼈는데 아마 많은 사람이 같은 감정을 경험한 듯하다. 그 감동의 원천이 뭔지는 얼마 안가서 밝혀졌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젊은 시절에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 두 채가량의 재산을 날린 후 지금까지 결혼도 못하고 기초수급자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머니에 1천원짜리 한 장만 있어도 감사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몸짓에서 우리는 주책스러움이 아니라 이런 초월의 경지를 느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욕심을 다 내려놓은 사람한테서만 볼 수 있는 즐거움과 여유로움이 감동을 준 것은 아니었을까?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된다면 어떤 상황이든 생각하기 나름이고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그가 처한 상황을 누군가는 절망적으로 바라보겠지만, 그는 오히려 감사해하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누군가 흉을 볼 수도 있었겠지만, 욕심을 내려놓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

돈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돈의 유무를 떠나 인생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 즐거운 경험들을 아주 많이 하고 있으므로, 죽음을 앞두었을 때 그래도 잘 살았다고 느끼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끝이 좋았기 때문이다. 인생의 고통은 욕심을 부릴수록 누적될 수밖에 없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들 몸부림치지만 살면 살수록 고통은 쌓여만 간다. 그렇다면 쌓여있는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녹으면서 화가 사라진다. 결국은 욕심을 다 내려놓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인생이 재미있어지고 살 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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