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허위정보와의 전쟁

  • 김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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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23   |  발행일 2019-04-23 제30면   |  수정 2019-04-23
다른 사람을 해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할 자유는
어느 누구에게도 허용 불가
민사적·형사적 제재 이외에
더 효과적인 차단방법 있나
[화요진단] 허위정보와의 전쟁

‘대통령이 술을 마셔서 산불 진화 지시가 늦어졌다’거나 ‘대통령이 보톡스 맞느라 산불진화 지시가 지연됐다’는 허무맹랑한 말이 이달 초 강원도 산불과 관련해 나돌았다. 청와대는 발끈했다. ‘명백한 허위,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봤다. 더불어민주당도 즉각 유포자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나섰다.

허위라고 법원 판결까지 나온 1980년 5·18 광주항쟁 당시 북한군 개입설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는 가짜뉴스(시리아 난민 유입과 영국의 경제적 부담 등에 대한 허위사실)에 휘둘려 실제 민의가 뒤집어졌다. 같은 해 미국 대선전에선 ‘교황이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다’‘빌 클린턴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등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언비어가 삽시간에 퍼졌다. 전 세계에 가짜뉴스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슬로안 경영대학원 연구팀이 트위터 사용자 300만명의 2006년부터 2017년까지 공유 뉴스 항목 12만6천개를 분석한 결과, 가짜뉴스가 진실 뉴스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나가는 경향이 있었다. 가짜뉴스가 퍼지는 속도는 진실보다 6배나 빨랐다. 정치·경제·연예를 불문하고 같은 패턴을 보였다.

지난해 국내 모 남성 PD와 여배우의 가짜 불륜설이 일반인에게 광범위하게 퍼지는 데 걸린 시간은 단 3일이었다고 한다. 허위정보의 파급력을 실감케 한 이 사건은 SNS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청소년이 가짜 뉴스에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점은 특히 큰 걱정거리다.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팀이 청소년 7천8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2%가 가짜 뉴스를 골라내지 못했다. 허위정보가 청소년에게 침투할 수 있는 개연성이 그만큼 클 것으로 짐작된다.

어린이·청소년들의 유해 콘텐츠 무방비 노출 심각성을 깨달은 영국정부는 온라인상에서 허위정보 등 유해 콘텐츠 확산을 방치한 플랫폼 사업자에게 벌금을 부과하거나 플랫폼 접속을 차단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SNS 규제안을 발표했다.

독일은 가짜뉴스유통금지법을 만들어 가짜뉴스 유포자뿐 아니라 정보통신서비스 업자에게도 삭제의무를 지우고, 어길 경우 최대 5천만유로(한화 약 640억원)의 벌금을 때린다.

선진국의 추세와 달리 국내에서의 허위정보 대응책은 미온적이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정부 차원의 가짜뉴스 단속에 회의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가짜뉴스 단속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으며, 시민사회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 시장론’이 이론적 배경이라고 한다. 사상의 시장에서 진실과 허위가 싸우면 결국 진실이 승리할 것이라는 순진하면서도 낙관론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밀도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지만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거짓말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보호된다’는, 자유주의·민주주의 체제를 대표하는 국가 미국에서조차 명예훼손·사기 등은 보호받지 못한다.

‘완전한 표현의 자유’는 더할나위 없이 바람직하고 아름답다. 단 허위사실로 타인을 해하지 않아야 한다. 허위사실로 타인을 해할 자유는 누구에게도 허용돼선 안 되며 누구에게도 없다.

국내에서 가짜뉴스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진 것은 2017년 19대 대통령 선거 때부터다. 이후 가짜뉴스와 관련한 법안이 20여개나 국회에 발의됐다. 눈에 띄는 성과가 있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공급자의 자성과 수용자들의 각성, 시민사회 차원의 대책만으로는 효과가 미미하고 더딜 것이다. 허위정보 유통을 방치하는 플랫폼이나 작심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사람을 막는 데 민·형사적 책임을 엄하게 묻는 외에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국회의 분발이 필요하다.

김기오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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