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석의 電影雜感 2.0] 한국영화계 최초 노동영화 ‘파업전야’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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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10   |  발행일 2019-05-10 제43면   |  수정 2019-05-10
30년전 노동현장 되돌아보며 여전히 ‘진보’ 하지 않은 냉혹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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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전야’ 언론시사회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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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전야’(2019)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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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전야’(1989) 포스터

‘장산곶매’는 1988년 대학 내에서 영화동아리 활동을 하던 이들이 ‘우리 영화문화의 전반적 위기 속에서 진정으로 영화가 수행해야 하는 기능, 이 땅 대중의 건강한 삶을 묘사하고 형상화하는 민족영화를 모색하고 실천하고자 공동창작, 공동작업 방식을 추구’하고자 창립한 영화집단이었다. 소설가 황석영이 쓴 동명의 희곡에서 단체 이름을 가져왔다. 이들은 1988년 당시로서는 금기에 속했던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오! 꿈의 나라’를 세상에 내놓으며 활동을 시작했다. 첫 영화 이후 자연스럽게 두 번째 작품으로 노동운동을 그려보자는 기획의 산물이 바로 ‘파업전야’였다.

‘파업전야’는 1987년 인천 남동공단을 배경으로 어려운 여건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을 조직하는 과정을 사실주의 수법으로 묘사했다. 1990년 세계 노동절 101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한국영화계 최초의 노동 영화의 탄생이었다. 당시 영화 촬영에는 실제 노동자들이 출연해 서툴지만 실감나는 연기를 선보였고,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이나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의 위장취업, 노조 결성, 사업주의 반발과 해고, 구사대 등장 같은 당시 노동현장과 노동운동의 전형적인 요소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파업을 선동하고 있다는 노태우정권의 판단으로 혹독한 검열과 탄압이 이어지면서 공식 상영의 길이 막혔던 ‘파업전야’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법 순회 상영회를 통해 관객들을 만났다. 경찰은 ‘파업전야’가 상영되는 대학에 어김없이 대규모 병력을 보내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그래도 막지 못하면 학내로 강제 진입해 최루탄을 난사했다. 광주 전남대 상영에서는 헬기까지 동원한 경찰이 학교 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이렇듯 ‘상영하고 관람하는 것 자체가 투쟁’이었던 ‘파업전야’는 당시 비공식 기록으로 대략 30만명이 관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록은 훗날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 전까지 독립영화계에선 깨지지 않던 기록이었다.


1987년 인천 남동공단 배경 제작
실제 노동자 출연 실감나는 연기
파업선동 이유 공식 상영길 막혀
대학 상영, 경찰 최루탄까지 난사
탄압·검열 강화에도 30만명 관람
제작비 충당 잇단 기부·응원물결
장윤현·장동홍 감독, 공수창 작가
차기작품 대중적으로 성공, 맹활약



‘파업전야’ 제작에는 2천만원 정도가 필요했는데 대부분 장산곶매 회원들의 지인들에게 조금씩 빌려서 충당했기에 부채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차기작을 만들기 위한 초기 자금도 마련해야 하는 부담도 더했다. 그러나 노태우정권이 불법 상영으로 규정한 탓에 ‘파업전야’를 자신의 영화관에 걸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식이 지금도 독립영화의 요긴한 상영방식인 공동체 상영이었다. 대학마다 필름과 영사기를 가지고 다니며 게릴라 상영회를 이어갔다. 당시 관람료는 무료였는데, ‘독립영화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장산곶매 회원들 사이에 있었다고. 대신 상영회마다 관람료 대신 영화 팸플릿을 1천원에 팔았는데 그 수익이 1억원에 달했다고 한다. 관람료 대신 상영회에서 돌린 모금함에는 돈은 물론 금목걸이와 반지까지 기부하며 응원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 수익금으로 ‘파업전야’ 제작비를 갚고, 차기작 ‘닫힌 교문을 열며’도 만들 수 있었다.

전교조 문제를 다룬 세 번째 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를 끝으로 뿔뿔이 흩어진 이들 가운데 몇은 충무로로 들어갔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 받았던 이는 장윤현 감독일 것이다. ‘파업전야’의 공동 연출을 맡았던 장 감독은 1992년 헝가리 국립영화학교를 수료하고 돌아와 1997년 서울관객 80만명을 동원했던 ‘접속’을 만들며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A Lover’s Concerto’나 ‘Pale Blue Eyes’ 같은 곡들이 영화에 삽입되면서 신드롬에 가까운 대중들의 반응을 이끌어낸 그는 ‘텔 미 썸딩’ ‘썸’ ‘황진이’ ‘가비’ 같은 작품들을 잇따라 내놓았다. ‘연풍연가’ ‘꽃섬’ 같은 작품을 직접 제작하기도 한다.

장윤현 감독과 함께 ‘파업전야’ 공동 연출자 가운데 하나였던 장동홍 감독은 1998년 겨울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을 배우 김현주와 박용하를 기용해 상업영화 데뷔작을 만들었고 오랜 침묵을 지키다 2009년 배우 윤제문과 ‘이웃집 남자’를 차기작으로 만들었다.

‘파업전야’의 시나리오를 썼던 공수창 감독은 소설가 안정효 원작의 ‘하얀 전쟁’, 소설가 이순원 원작의 ‘비상구가 없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일본 원작을 번안한 ‘링’ ‘텔 미 썸딩’의 각본을 담당하며 충무로 대세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다 2004년 ‘알 포인트’로 연출 데뷔해 ‘GP506’을 차기작으로 내놓은 바 있다.

‘파업전야’의 제작을 맡았던 이은 감독의 행보가 흥미로운데, 그는 충무로로 들어와 아내 심재명과 함께 명필름을 창립해 장윤현 감독의 ‘접속’이나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같은 작품을 내놓고 평단과 대중들의 고른 지지를 받고 있는 제작자가 되었다. 1998년엔 배우 임창정, 고소영과 함께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명필름에서 2014년 부지영 감독의 ‘카트’를 제작해 세상에 선보인 것도 어찌 보면 장산곶매가 가졌던 문제의식을 여전히 회원들이 지키는 가운데 지금까지 벼리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전태일 열사 기일에 맞춰 개봉한 ‘카트’는 상업영화임에도 노동자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과 자신의 삶을 지키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선 싸울 수밖에 없다는 당위를 그려 흥미로웠다. 끈끈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파업전야’ 속 노동자들의 모습과 달리 ‘카트’의 노동자들은 개개인이 파편화되어 갈등을 드러내는 차이에서 ‘파업전야’ 이후 30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노동 현실을 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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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김군,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한 김용균,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조 활동을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염호석. 그들 모두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이거나 하도급노동자였다. ‘파업전야’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던 노래 ‘철의 노동자’ 가사처럼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우리들은 30년이 지나도 ‘진보’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프게 깨닫게 하는 ‘파업전야’가 마블 히어로들의 스크린 독과점 속에서 고전하는 걸 지켜보는 것은 슬프다.

독립영화감독, 물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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