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거품시대

  • 원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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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15   |  발행일 2019-05-15 제31면   |  수정 2019-05-15

국방의 의무를 마친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한민국 남성들은 군대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다. 군대라는 그 특수한 집단에서는 사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계급 마에가리’다. 알다시피 ‘마에가리’는 미리 앞당겨서 지급받는다는 뜻의 가불·가지급(假拂·假支給)을 의미하는 일본어다.

논산 훈련소에서 4주간의 기본 군사훈련을 마친 후 받는 노오란 작대기 하나 계급장은 ‘50만 촉광에 빛난다’고 표현될 정도로 감격스럽다. 하지만 자대에 배치되면 이등병 시절은 잠시 유예된다. 중대 인사계(상사)의 지시와 중대장의 묵인하에 작대기를 하나 더 붙여 슬그머니 일병으로 변신해 버리기 때문이다. 규모가 큰 대대의 경우 타 중대는 물론이고 소속조차 다른 영외 중대 부대원들과 함께 취사장·연병장을 사용한다. 다른 부대 고참의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해주려는 중대 인사계의 배려였다. 그래서 실제로는 이등병이지만 본의 아니게 일등병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삼십 몇 년이나 지났지만 필자도 김모 상사의 지시와 이모 대위의 묵인하에 그런 경험을 했다. 계급 마에가리는 편법 계급 인플레인 셈이다.

이 같은 직급·계급 인플레는 군대뿐 아니라 사회에도 만연하다. 대형 종합병원들이야 대표하는 원장이 한 명이지만, 치과병원·한의원 등 작은 개인병원은 다르다. 근무 의사들이 몇 명이건 모두 원장이어서 원장이 열 명 가까이 되는 병원도 있다. 너무 속내가 보인다 싶었는지 한 명은 대표원장, 다른 의사들은 그냥 원장인 경우도 있다. 병원뿐 아니라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업들은 지사·본부의 격을 높인다는 핑계로 온갖 편법을 동원해 그럴듯하게 포장하곤 한다.

이런 직급 인플레가 가장 심한 곳은 아마도 골프장인 것 같다. 캐디들이 라운딩하는 골퍼들 모두에게 ‘사장님’이라고 부르니 말이다. 거품이다. 회장은 또 얼마나 많은가. 산악회·운동·사교 모임마다 그 모임의 대장은 회장이라는 직함을 쓴다. 이러니 나이가 지긋한 남성이라면 무슨 단체든 한 번쯤 회장을 안 해본 사람이 드물다. 도처에 회장님들이 넘쳐난다. 시내 붐비는 거리에서 ‘회장님’ 하고 불러보면 가던 남자 10명 중 대여섯 명이 뒤돌아 본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우리는 인플레 시대에 거품을 먹으며 살고 있다.

원도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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