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복사지서 신라때 조성 추정 쌍탑터 발견

  • 송종욱
  • |
  • 입력 2019-05-16 07:32  |  수정 2019-05-16 09:05  |  발행일 2019-05-16 제9면
한변 6m 정사각형 목탑터 2개
종묘 제단 주장있어 논쟁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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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복사 목탑터. <성림문화재연구원 제공>

[경주] 경주 황복사(皇福寺) 터에서 신라 때 처음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쌍탑터가 발견됐다.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성림문화재연구원은 경주 낭산(사적 제163호)에 있는 황복사 부지에서 한 변이 6m인 정사각형 목탑터 2개를 발견했다고 15일 밝혔다. 또 사찰 중심 건물인 금당(金堂)과 탑 2개, 중문이 남북 방향으로 배치된 사실이 확인됐다.

사찰을 처음 조성한 시기는 중문터 적심(주춧돌 위에 쌓는 돌무더기)과 단각고배(짧은다리굽다리접시), 연꽃무늬 수막새를 근거로 6세기 후반~7세기로 보인다고 연구원은 설명했다. 이전까지 신라가 조성한 최초의 쌍탑은 679년 창건한 경주 사천왕사로 알려졌다. 그러나 목탑터 규모가 작고 주변에 비를 세운 건물인 비각이 있으며 중문터와 가깝다는 점으로 미뤄 종묘와 관련된 제단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어 앞으로 학계에서 치열한 논쟁이 예고된다.

황복사는 삼국유사에 654년 의상대사가 29세 나이로 출가했다고 기록된 절이다. 의상대사가 허공을 밟고 올라가 탑돌이를 했다는 말이 전하기도 한다. 1942년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 해체 때 나온 금동사리함 뚜껑에서 ‘종묘성령선원가람’(죽은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의 신성한 영령을 위해 세운 선원가람)이라는 글자가 나와 왕실 사찰로 추정돼 왔다. 목탑터 앞에 있는 금당은 정면 7칸·측면 4칸 규모로, 길이가 28m와 16m다. 중문은 정면 3칸·측면 2칸이며 증축 흔적이 있다. 또 십이지신상 건물터엔 이전에 나온 토끼·뱀·말·양 조각상에 이어 소·쥐·돼지·개 조각상이 추가로 나왔다. 십이지신상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노세 우시조(1889∼1954)가 발굴해 흑백사진이 남아 있다. 유물은 금동입불상, 금동판불, 비석 조각, 장식기와인 치미, 녹색 유약을 바른 벽돌인 녹유전 등 700여 점이 출토됐다.

송종욱기자 sjw@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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