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배심원들’ 문소리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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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17   |  발행일 2019-05-17 제43면   |  수정 2019-05-17
“일 중독 빠진 ‘벙커 판사’…첫 국민참여재판 관객 마음 움직이는 판결 고민”
[시네토크] ‘배심원들’ 문소리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김준겸 판사가 처음 판사에 임용됐을 때 자신의 파일에 새겨 놓은 문구(형사소송의 대원칙)다. 비법대 출신으로 형사 재판만 18년째 맡아온 그가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대한민국 첫 국민참여재판의 재판장을 맡았다. 가장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인 사법부가 여성 판사인 그를 내세운 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증거와 증언, 무엇보다 피고인의 자백으로 유죄가 확실시되는 존속살해사건. 양형 결정만 남은 상황이지만 끈질기게 질문과 문제를 제기하는 8번 배심원 권남우(박형식)를 포함한 배심원들의 돌발 행동에 재판은 점점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2008년 국민참여재판을 스크린에 불러낸 영화 ‘배심원들’에서 문소리는 8명의 배심원을 상대로 판사 본연의 논리와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는 재판장 김준겸을 연기했다. 녹록지 않았다. 김준겸이 살아온 삶의 궤적과 무게를 설명해주는 극적장치가 없어 관객에게 그를 납득시키는 게 부담스러웠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고, 적당히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이 나와 비슷하다”는 점에 힘을 얻어 영화인으로서의 삶에 오롯이 집중해온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맞춤옷을 입은 듯 재판장으로서의 무게감과 카리스마는 물론, 지적인 매력과 인간적인 면모까지 동시에 풍기며 배우 문소리가 우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배심원 8명 참여 전국민 이목 집중한 재판
비법대 출신 형사부 18년 경력의 여성 판사
노력·열정으로 자리 오른 강단있는 캐릭터
사법부·배심원 미묘한 충돌 완충제 역할”

“모든 출연자 교감하며 찍은 선고신 뭉클
맑고 화사한 박형식, 팀원 잘 만난 건 복
법리·원칙보다 사람 마음이 더 우선 생각
연출자·교수로 활동, 제작에도 관심 생겨”

▶이 작품은 어떤 점에서 끌렸나.

“재밌었다. 시나리오를 몇 장 넘기면서부터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해질 만큼 빠져들었다. 배심원 8명이 함께 서사를 이끌어가는 구조도 마음에 들었고, 감독님이 공을 들인 흔적이 많이 보였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영화는 8명의 배심원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경위 최영우씨를 포함해 내 옆 좌배석판사에 태인호씨, 우배석판사에 이해운씨, 검사 이영진씨가 있고, 변호사 서진원씨도 있다. 또 방청석을 가득 채운 보조출연자들도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이 법정에서 한 팀이 돼 움직이는 과정이 우리한테도 굉장히 특별했지만 관객이 보기에도 흔치 않은 작품으로 남을 것 같았다.”

▶김준겸은 철저하게 판사 본연의 논리와 원칙을 고수하는 인물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했나.

“비법대 출신의 여성 판사로 18년 동안 형사부에 있었다. 그런 조건들에서 느껴지는 건 이 사람이 권력지향적인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판사로서 정말 기본에 충실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법조계 은어로 ‘벙커 판사’라고 있다. 권위적이고 후배 법관들에게 깐깐한 재판장을 일컫는 말이다. 김준겸은 조금 다른 의미로 일중독에 빠져 사는 ‘벙커 판사’라고 생각한다. 피나는 노력과 열정으로 이 자리까지 왔으니 자긍심이 대단할 것이다. 그런 그였기에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첫 국민참여재판의 재판장을 맡으면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이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만큼 강단있고 단단한 사람이다.”

▶그런 김준겸 캐릭터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이 마지막 선고 장면일 텐데.

“김준겸은 단순히 배심원의 반대편에 서 있는 역할이 아니다. 그는 사법부의 윗선과 배심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충돌을 다 받아내는 완충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감독님이 마지막 장면만큼은 그동안 유지해오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벗어나 강한 모습을 보여주길 원하셨다. 하지만 당시 사회분위기도 그렇고 배심원 8명을 내가 끌어안아야 한다면 강렬한 모습으로의 극적인 변화가 굳이 필요할 것 같진 않았다. 무죄를 선고했다고 누군가는 지고 이기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초심을 유지하면서 오히려 무언가 참회하는 모습이 드러나 보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게 지금까지 보여줬던 김준겸 캐릭터에도 가장 잘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법의 존재이유에 대해 말하는 마지막 판결문은 모두가 뭉클했을 것 같다.

“대사가 너무 명언같고 좋으면 외려 상투적으로 느껴져 거부감이 든다. 이번의 경우는 법적 용어들이라 어려운 것도 있고 대체적으로 감정이 배제된 문장들이라 귀에 쏙쏙 들어오기가 힘들다. 재판을 참관해보면 판사들이 판결문을 읽을 때 중간은 귀담아 듣지 않아도 마지막 선고에는 모두가 귀를 기울여 집중한다.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이 대통령 탄핵 주문을 읽을 때 마지막 선고에 모두가 주목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에게 다가가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지점들이 되게 고민스러웠다.”

▶선고를 내리는 장면이 이 영화의 마지막 촬영이었는데.

“김준겸의 단독신이었다. 때문에 감독님이 이 장면부터 먼저 찍자며 나만 촬영장으로 불렀다. 하지만 판결문의 선고는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데 그렇게 나 혼자 찍으면 감정과 느낌이 잘 살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마지막 촬영은 이 영화를 함께 해온 모든 분들과 교감하면서 찍고 싶었다. 그래야 의미가 더 살아날 것 같았다. 감독님에게 법정안을 사람들로 꽉 채워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그렇게 하려면 보조 출연자까지 모두가 아침 일찍 나와서 세팅을 해야 한다. 하지만 첫 테이크에서 감독님의 ‘컷’ 사인이 들리자 모두가 박수를 쳐주셨다. 그 때 정말 뭉클했다.”

▶박형식과의 호흡은 어땠나.

“처음에는 너무 맑고 화사하고 그림같이 아름다운 청년이 오길래 ‘저 사람이 8번 배심원이라고요?’ 그랬다. 등장인물이 많은 영화인데 그 속에서 저 맑고 화사한 아름다움이 튀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을 했다. 형식씨는 만화에서 나온 것처럼 좀 (외모가)비현실적이었다. 그런데 첫 촬영과 두 번째 촬영이 끝나고 고생 좀 하더니 어느 날 ‘누나’ 이러고 오는데 극 중 권남우가 됐더라.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저렇게 하고 싶은데?’ 이러는 모습들이 딱 권남우였다. 사실 형식씨가 연기도 잘하지만 다른 배심원들로 나오는 배우들의 역할이 컸다. 그래서 형식씨한테도 첫 영화인데 이런 팀을 만나서 정말 복받은 거라고 말해줬다.”

▶국민참여재판을 참관한 적은 있나.

“몇 번 참관했지만 국민참여재판이 많지는 않다. 전체 재판의 1%대에 불과하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배심원들의 의견을 법적 효력으로 인정하지 않고 참고하는 정도다. 통계적으로 보면 국민참여재판의 무죄 선고율이 훨씬 높고, 판사들의 연차가 오래될수록 유죄 선고율이 높게 나타난다.”

▶극 중 유죄 판결문까지 써온 김준겸 판사가 무죄를 선고한 건 그 점에서 되게 이례적인 일이겠다.

“그렇긴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주로 양형이 줄어든 경우인데 2년형을 선고한다고 써왔다가 마지막 진술을 듣고 1년으로 바뀐 경우도 많다고 했다. 구두로 판결을 내리는 게 판결문보다 더 큰 효력이 발생한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과연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점을 가졌는데 법적으로 다 가능한 일이었다. 유죄로 볼 만한 합리적 근거가 없기에 무죄를 선고한 거다. 그 장면을 찍으면서 법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건데 국민을 힘들고 억울하게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의미있는 소재를 다룬 영화라 출연한 느낌도 남다를 것 같다.

“첫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소재도 의미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마음을 모아서 무언가 작지만 승리감을 주는 영화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정말 많은 배우들이 ‘우리가 팀플레이를 하는구나’라는 걸 너무나 강하게 느낄 수 있었고, 이런 팀워크가 주는 행복감, 그 과정의 즐거움, 내 만족감이 굉장히 컸던 영화다.”

▶법에 대한 생각도 전과는 달라졌을 것 같은데.

“일단 많은 여성 판사들을 만나면서 처음에는 우리와 굉장히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여느 직장 여성처럼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그분들이 조금 더 인간적으로 가깝게 느껴졌다. 동시에 우리가 법을 너무 두려워하고 멀리해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법리도 중요하고 원칙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 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판사석에 앉아 재판을 진행하는 역할이라 신체적인 제약도 많았겠다.

“그래서 숙소에서 촬영장인 양수리 세트장에 갈 때 일부러 한시간 걸리는 거리를 걸어서 갔다. 점심시간에도 휴식시간을 이용해 배우 조한철씨에게 배운 아르헨티나 탱고로 땀이 나도록 몸을 흔들었다.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몸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계속 있어야 하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담이 올 것 같았다. 대신 연기는 전보다 더 밀도있게 접근해야 했다. 모든 연기를 대사와 눈빛, 표정으로만 보여줘야 했는데, 사건기록을 넘기는 속도는 물론,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까지 신중하게 생각한 후 표현했다. ‘우생순’에서 핸드볼할 때가 그립더라.”(웃음)

▶연출자이자 교수로도 외연을 넓혀가고 있다. 김준겸 못지않게 일중독에 빠져 지내는 건 아닌가.

“일중독이라기 보다는 영화를 너무 좋아한다. 요즘은 제작에도 관심이 생겼다. 영화쪽 일을 오래 하다보니 지인들 대부분이 영화에 종사한다. 그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이런저런 아이템들이 나온다. 그 중 괜찮다 싶은 게 있으면 직접 제작을 해볼까라는 생각도 든다. 최근 배우 리즈 위더스푼이 제작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되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시도는 해보려고 한다. 물론 어떤 거창한 목표가 있는 건 아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까지 올라가고 무엇을 이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좋은 동료들과 지금처럼 재밌게 일을 하고, 탐험해가는 과정 자체가 보람되고 즐겁다.”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제공=씨제스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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