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파타고니아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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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24   |  발행일 2019-05-24 제37면   |  수정 2019-07-26
거대한 푸른 뿔 펼쳐진 병풍아래 푸른빛 뿜어내는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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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오에 호수와 파이네의 뿔들. 섬에 있는 것이 ‘오스테리아 페오에’ 숙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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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를 막고 서 있는 야생 과나코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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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토 그란데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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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호수로 향하는 출렁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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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출입국 사무소. 뒤로 토레스 델 파이네와 푸에르토 나탈레스 이정표가 보인다.

아르헨티나 엘 찰텐에서 피츠로이 트레킹을 마치고 다시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를 보기 위해 칠레 푸에르토 나탈레스(Puerto Natales)로 넘어갔다. 파타고니아 동부는 아르헨티나, 서부는 칠레이다 보니 국경을 넘나들어야 한다. 엘 찰텐에서 푸에르토 나탈레스까지는 버스로 약 7시간 거리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처음 발을 디딘 칠레 파타고니아는 울티마 에스페란자(Ultima Esperanza), 즉 ‘마지막 희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이었다. 이처럼 비장한 이름이 붙은 것은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의 원시 자연 때문이리라. 인간이 살 수 있는 땅 가운데 가장 아래쪽으로 몰린 이 지역은 인류의 개발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의 마지막 희망 같은 곳이었다.

원시자연 간직 세계 3대 트레킹 스폿
대초원 2천∼3천m 높이 거대한 바위
톱날처럼 솟은 바위산 압도적 ‘삼봉’
설산 가장 높은 봉우리‘파이네 그란데’

버스투어 중 마주친 야생 과나코 무리
영역 발들인 침입자 나무라듯 바라봐

큰 소리 내며 위용 자랑 빙하수 폭포
호수위 작은섬 그림처럼 자리한 호텔
무엇을 보든간에 상상 그이상의 풍경


토레스 델 파이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이자 세계 3대 트레킹 스폿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서 남쪽으로 112㎞ 떨어진 푸에르토 나탈레스는 트레커들을 위한 마을이다. 이곳에는 트레킹을 위한 장비 대여점과 와인 숍, 카페와 식당이 즐비하다. 트레킹을 전후한 준비와 휴식을 위한 마을인 것이다.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은 보통 두 종류로 나뉜다. 가장 인기 있는 코스는 트레일의 모양이 알파벳 W 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W 트랙으로 불리는 4박5일 코스이며, 다른 하나는 W 트랙과 그 뒤까지 전 구간을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101㎞의 7박8일 일주 코스다. 일정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나는 이처럼 긴 트레킹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신 버스투어를 하기로 했다. 버스투어도 W 트랙에서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포인트를 볼 수 있어서 나름 괜찮은 대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파타고니아 대초원 지대에 2천m에서 3천m의 높이로 치솟은 거대한 바위 산군들로 유명하다. 특히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거대한 봉우리가 단연 압도적이다. 이 삼봉(三峰)은 마치 ‘山’자처럼 가운데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고, 좌우에 두 봉우리가 중앙 봉우리를 보좌한다. ‘파이네’는 이곳의 원주민이었던 테우엘체(Tehuelche) 족의 언어로 파란색을 의미하고, 토레스는 스페인어로 탑이란 뜻이다. 삼봉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는 ‘파이네 그란데’로 불리고, 나머지는 ‘푸른 뿔’이라는 의미의 ‘쿠에르노스 델 파이네(Cuernos del Paine)’로 불린다. 1천810㎢의 이 공원 지역에는 빙하가 녹은 물이 만들어낸 크고 작은 호수와 그 물이 흘러가며 이루는 폭포, 수만 년을 버텨온 바위 설산이 있다. 대지 위에는 바람에 맞서는 초원과 높이 올라갈수록 점점 키가 작아지는 렝가나무 숲이 있다. 이곳의 자연을 만들어낸 것은 혹독한 날씨와 바람이다. 이곳에 사는 동식물들만이 이곳의 자연에 순응하며 온전히 주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니 방문객인 인간이 갖추어야 할 예의는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리라.

다음 날 아침 일찍 파타고니아 평원으로 이어지는 9번 도로를 달리며 버스투어를 시작했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여정에서 처음 마주친 것은 야생 과나코(guanaco) 무리였다. 유유히 도로를 점거한 채 물끄러미 우리 버스를 바라보고 있는 녀석들은 허락도 없이 그들의 영역에 발을 들인 우리를 나무라는 듯하다. 그렇거나 말거나 우리들은 큰 구경거리를 만난 듯 우르르 버스에서 내려 기념촬영에 바쁘다. 무시하듯 사람이 가까이 가도 달아날 생각을 않는다. 녀석들을 구경거리로 여기는 우리들에게 보내는 경고일 게다. 누가 보아도 푸른 설산에 어울리는 것은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걸친 채 호들갑을 떠는 우리가 아니라 무심하게 먼 산을 응시하는 녀석들이다. 녀석들 옆으로는 난두(nandu)라고 불리는 아메리카 타조 가족도 서성이고 있었다. 과나코와 달리 경계하며 몸을 움츠린다. 그리고는 우리의 눈길을 느꼈는지 재빠르게 숲으로 몸을 숨겼다.

다시 초원을 달리던 버스는 사르미엔토 호수(Lago Sarmiento)에서 멈추었다. 이곳은 토레스 델 파이네의 삼봉과 파이네의 뿔들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대이다. 푸른 호수를 배경으로 펼쳐진 설산 뒤로 이 공원의 상징과도 같은 푸른 탑, 토레스 델 파이네가 보였다. 구름의 흐름을 따라 언뜻언뜻 세 개의 뾰족한 봉우리가 드러났다. 아래 위 푸른 하늘과 호수를 배경으로 구름을 이고 있는 봉우리들이 환시(幻視) 같았다. 순간 그곳 가까이 가보고 싶다는 염치 없는 욕망이 불끈 일었다. 왜 사람들이 며칠 밤낮을 이 안에서 지새우며 걷고 또 걸으려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토레스 델 파이네는 멀리서도 사람을 강하게 끌어당기며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어서 국립공원 안내소가 나타났다. 안내소 앞에는 공원을 보호하는 다양한 금지 규정들이 적혀있었다. 사무실 안에는 또 5일간의 날씨를 수기로 적은 칠판이 보였다. 오늘은 바람이 시속 29㎞에 최저 영하 2℃였다. 게다가 구름과 비 표시의 그림을 보니 와락 걱정이 앞섰다. 처음 마주했던 그 환시 같던 광경이 더욱 조바심을 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눈에 띄는 한 문구에 일순 마음이 풀렸다. ‘Life is a long weekend.’ 그래, 인생은 긴 주말이지. 여유 있게 자연이 주는 대로 즐기자. 더구나 시속 50㎞가 넘는 바람이 불었던 어제에 비하면 좋은 날씨 아닌가.

버스는 다시 아마르가 호수(Laguna Amarga)에서 멈췄다. 아마르가 호수는 빙하가 녹은 물이 고여 있는 우윳빛 호수이다. 호수를 끼고 나지막한 휴게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런치타임을 포함해 상당한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점심을 먹고 나니 몸도 마음도 더욱 여유로워졌다. 느긋하게 호숫가를 거닐었다. 이곳에서도 파이네의 뿔들이 멋진 배경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의 숲과 나무들이 이상했다. 큰 생채기처럼 검게 그을렸거나 말라 죽은 나무들이 가득했다. 몇 년 전 여행객이 낸 산불의 흔적이었다. 지금은 그 사이로 새 나무들이 돋아나고 불탄 나무 둥치들도 바람에 씻기면서 어색하지 않게 어울리고 있었다. 이처럼 자연은 빠르게 자기 몸을 회복하고 있었지만 과나코를 마주쳤을 때처럼 또다시 미안하고 부끄러워졌다.

다음 여정은 페오에 호수(Lago Pehoe)에서 살토 그란데(Salto Grande) 폭포까지의 미니 트레킹이었다. 주위에 작은 꽃들이 널려있고, 멀리 웅장한 바위와 빙하로 덮여있는 산줄기가 펼쳐지는 트레일은 잠깐이나마 트레킹의 묘미를 맛보게 했다. 호수에서 이어지는 깊은 계곡을 거슬러가니 옥빛 빙하수가 큰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계곡 사이로 무지개가 떴다. 폭포가 가까워진 것이다. 살짝 언덕을 올라서니 살토 그란데 폭포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폭포 위로 파이네의 뿔들이 줄지어 서서 우리가 걸어가는 만큼 가깝게 다가온다. 멀리 이 공원에서 가장 높은 해발 3천50m의 파이네 그란데도 눈에 들어왔다. 산봉우리 사이로 톱날처럼 솟아있는 바위산들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W 트랙을 따라 걸으면 저런 봉우리들을 좀 더 가까이에서 전망할 수 있겠다. 이곳이 세계 3대 트레킹으로 손꼽는 이유가 이것일 게다.

폭포 위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봉우리들은 또 다른 모습이다. 산 아래 펼쳐지는 호수의 모습도 색달랐다. 페오에 호수에 떠있는 작은 섬에는 ‘오스테리아 페오에(Hosteria Pehoe)’라는 호텔이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작은 나무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이곳은 1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여행자들의 숙소이자 레스토랑이란다. 언젠가 꼭 한번 묵고 싶다는 욕망이 또 일었다. 이런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순전히 이곳의 푸른 호수, 푸른 탑, 푸른 뿔, 푸른 하늘 때문이다. 차분하게 관조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겸연쩍어 이런 변명을 지어본다.

내내 그 풍경을 품은 채 다음 여정인 그레이 호수(Lago Grey)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도 한 시간 남짓 트레킹을 했다. 그레이 빙하로 향하는 트레일에서도 웅장한 바위산들이 계속 모습을 바꿔가며 우리를 따라왔다.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자 그레이 강(Rio Grey)으로 모랫길이 펼쳐졌다. 발이 푹푹 빠지는데다 갑자기 차갑고 사나워진 바람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렇게 힘겹게 모래 둔덕을 넘으니 장대한 회색빛 호수가 눈을 차고 들어왔다. 호수 위쪽의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유빙들이 조각배처럼 넘실거렸다. 이곳을 호수라고 할 수 있을까. 넘실대는 파도와 차가운 바람, 회색 모래와 물빛 등이 이제껏 보았던 경치들과는 사뭇 달랐다. 산을 덮고 있는 빙하는 서서히 흘러 이 호수에서 끝나고 있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돌아오는 버스 차창 밖으로 내다본 풍경은 광활하고 황량하다. 듬성듬성한 풀과 나무들은 바람을 따라 방향을 바꿔가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곳을 견뎌낸다. 저 황량한 땅에서라면 외로움 때문에라도 지레 절명하겠건만.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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