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애의 문화 담론] 6월이면 생각나는 戰火의 상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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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31   |  발행일 2019-05-31 제39면   |  수정 2019-05-31
낙동강물 시뻘겋게 물들인 전적지 ‘호국의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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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3일 낙동강 왜관철교가 폭파됐다. 8월11일 국군이 파괴된 낙동강철교 앞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모습(위).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의 모습. <영남일보 DB>

호국보훈의 달, 6월이 오면 한 번 둘러볼 곳이 있다. 굳이 현충일이 아니어도 좋다. 짬이 나는 대로 애조 띤 레퀴엠(위령곡)이 은은히 울리는 국립영천호국원을 참배하고 낙동강 전적지 순례길에 나선다. 발걸음이 닿는 길가에 싱그러운 야생화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지만 6·25전쟁이 남긴 참혹한 전화(戰火)의 상흔(傷痕)이 곳곳에 묻어난다. 그동안 “한반도에서 총성이 사라졌다”는 말만 믿고 전쟁의 참상을 기억에서 지워버린 탓일까. 새삼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전쟁을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겐 ‘6·25’란 낱말조차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전쟁체험 세대인 어르신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국난의 역사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전쟁 발발 사흘 만인 1950년 6월28일 아침.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불법남침한 북한공산집단의 마수(魔手)에 유린되고 피란길에 오른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열차를 타고 남하 중이었다고 한다.

대통령 일행이 탄 임시열차가 왜관 철교를 지날 무렵 낙동강 유역은 오늘처럼 평화로웠다. 벼 이삭이 익어가는 낙동강 연안의 푸른 들녘을 바라보던 영부인이 “오, 아름다운 내 강산!”이라고 감탄하자 대통령은 자괴감에 사로잡혔다. 하여 대구에 도착하자마자 급히 열차를 되돌려 대전으로 올라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1950년 6·25 전쟁 사흘만에 수도 점령
韓·美 연합군 마지노선 낙동강 교두보
칠곡 석적·왜관·다부동서 8월 대공세
55일간 대반격, 엄청난 희생, 전세 역전
영남일보서 전한 낙동강전선 승전보
대구 사수 격전지‘다부동전적기념관’

핵 위협과 여전히 풀지 못한 南北관계
매몰돼 가고 있는 안보의식에 우려감



그렇게 평화롭던 낙동강 유역도 전쟁 발발 한 달 만에 전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최대의 격전지로 변하고 만다. 전 국토의 90%나 빼앗기고 대구, 부산만 온전히 남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나 다름이 없었다. 만약 대구를 사수하지 못하면 배후지역인 칠곡과 영천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마지막 남은 경산, 청도와 부산의 운명도 예측할 수 없었다.

이미 영천 보현산까지 진출한 적이 로켓포를 쏘아 올리고 대구역 광장에 포탄이 떨어지자 혼비백산한 대구시민들은 피란 봇짐을 싸기 바빴고 대전에서 대구로 임시수도를 옮긴 정부가 소개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이때 한·미 연합군이 설정한 마지노선이 낙동강 교두보. 최후까지 버틸 수 있는 마지막 한계선이었다. 이러구러 대구경북의 젖줄이던 낙동강 교두보는 반격작전에 나선 한·미 연합군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후, 최대의 격전지로 돌변한다.

그 무렵 동해안으로 침투해온 북한군은 울진과 영덕, 포항을 휩쓸고 태백산 준령을 넘은 또 다른 주력은 영주, 안동, 의성을 거쳐 마침내 영천으로 집결했다. 국군 제2군단이 하양에 CP(전방지휘소)를 설치하고 대구 사수를 위해 최후의 혈전을 벌인 영천대회전이다.

여기에다 서울을 점령하고 대전과 충남북을 거쳐 낙동강까지 파죽지세로 남하한 적은 칠곡의 석적, 왜관과 다부동에서 8월 대공세에 나선다. 이에 맞선 한·미 연합군은 장장 55일간의 대반격전에서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고 마침내 전세를 역전시켜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그로부터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낙동강변에는 호국평화기념관이 들어서 4D 입체영상을 통해 그 당시의 처절했던 전쟁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인근에는 종군작가단으로 참전해 전쟁문학의 진수를 보여줬던 이 고장 출신 구상 시인(1919~2004)의 문학관도 있다. 구상 시인이 그 당시 영남일보 지면에 낙동강전선의 생생한 승전보를 전하다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1953년에 취임하면서 일필휘지한 휘호가 ‘내일 아침 영남일보!’. 가판(街販) 청소년들을 통해 이 휘호가 카피로 유행했고 매일 오후 그 이튿날 조간으로 발행한 영남일보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는 얘기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호국평화기념관에서 작오산 고개 하나 넘으면 바로 유학산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다부동전적기념관이 나타난다. 다부동전선은 대구 사수를 위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버틴 유명한 격전지. 그 당시 전설적인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의 국군 제1사단이 북한군 정예 3개 사단과 격돌한 다부동전투는 6·25전쟁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영천과 칠곡뿐 아니라 안동, 예천, 상주, 의성, 군위 등 모든 낙동강 연안이 호국 순례지로 모자람이 없다.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미 공군 B-29 폭격기 편대의 융단폭격과 피아 간의 치열한 전투에 희생된 수많은 주검들이 낙동강물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흘러갔다는 비극적인 뒷얘기가 참혹했던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또 동해안 영덕엔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위장하기 위한 장사상륙작전이 전개돼 수백 명의 어린 학도병이 희생되었고 포항 사수작전에서도 최후까지 버티다가 꽃잎처럼 산화한 학도병 출전 기록은 순례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런 면에서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배어 있는 경북지역 전체가 호국의 성지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채 가공할 북한의 핵미사일을 머리에 이고 살면서 허황한 판문점선언으로 “봄이 왔다”고, “평화가 일상화되었다”고 외칠 뿐 얼어붙은 남북관계는 좀체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지난 4월27일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기념하는 평화 퍼포먼스까지 열었다. 북한의 불참 속에 우리만 기념하는 의미없는 반쪽짜리 행사였다.

이 때문인지 국민의 안보의식도 전에 없이 느슨하게 매몰돼 가고 있다. 얼마 전 서울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외부 행사에 참가했던 일부 시민들이 6·25 참전국 기념비를 받치고 있는 장대석(長臺石)에 도시락 밥상을 차려놓고 식사하는 데다 의자처럼 걸터 앉아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공개돼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설마한들 호국영령을 기리는 숙연한 장소에서 이럴 수가….

대구미술협회 사무처장·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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