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아티스트’ (미셀 아자나비시우스 감독·2011·미국·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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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07   |  발행일 2019-06-07 제42면   |  수정 2019-06-07
흑백 무성영화의 아름다움
[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아티스트’  (미셀 아자나비시우스 감독·2011·미국·프랑스)

여행을 다녀왔다. 일본 나오시마, ‘예술의 섬’이라 불리는 곳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지중미술관으로 유명한 곳. 고요한 여행이었다. 하늘과 바다와 바람과 숲, 그리고 침묵이 있었다. 복잡한 도심과 문명을 뒤로 하고, 고요함 속에서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을 한껏 누린 시간이었다. 세계 각국의 여행객들이 모여 작품을 감상하며, 고요함 속에서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된, 진정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여행의 피로를 전혀 느낄 수 없었던, 휴식과도 같은 그 시간들의 힘은 단언컨대 침묵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 ‘아티스트’는 무성영화다. 대사 없이 음악만 흐르는, ‘무언의 미학’으로 가득한 흑백영화다. 배경은 1920년대 말과 30년대 초 할리우드. 유성영화가 막 등장한 시기, 곧 사라질 운명인 무성영화 스타의 비애를 담은 작품이다. 주인공 조지 발렌타인은 무성영화 최고의 스타로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짧은 만남으로 인연을 맺은 무명의 페피 밀러는 유성영화의 떠오르는 스타가 된다. 제작사가 무성영화 제작중단을 선언하자 조지는 스스로 각본, 감독, 제작을 겸한다. “유성영화는 진지함이 없다”며, 스스로를 “꼭두각시가 아닌 아티스트”라 부른다. 하지만 자신이 제작한 영화는 관객의 외면을 받고, 같은 날 개봉한 페피 밀러 주연의 유성영화는 대성공을 거둔다. 좌절에 빠진 조지에게 스타가 된 페피가 손을 내밀지만, 조지는 거부한다. 실의에 빠진 나날을 보내던 그는 마침내 자신이 오만했음을 고백하고 페피의 도움으로 진정한 아티스트로 거듭나게 된다.

바야흐로 21세기, 3D, 4D시대에 흑백 무성영화를 제작한다는 건 흥미를 넘어 경이로운 일이다. 하지만 이 놀라운 모험은 당당하게 인정을 받았다. 2012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등 주요 부문을 수상했고, 타임지가 선정한 ‘2011 최고의 영화’로 꼽히기도 했다. 골든 글로브에서의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특히 각종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쓴 프랑스 배우 장 뒤자르댕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대사가 감정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순간의 눈빛, 혹은 눈썹의 움직임 하나로도 명확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면 그의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김은경의 영화의 심장소리] ‘아티스트’  (미셀 아자나비시우스 감독·2011·미국·프랑스)

실제 무성영화 스타였던 존 길버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등을 모델로 조지 발렌타인이라는 인물을 창조했다고 한다. 더글러스 페어뱅크스는 무성영화 최고의 액션스타로 역시 대스타인 메리 픽포드와의 결혼으로 유명하다. 극 중 페피 밀러의 집으로 촬영된 곳은 메리 픽포드의 집이며, 침대도 그녀가 쓰던 것이다. 영화에서는 조지 발렌타인이 재기에 성공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무성영화 스타가 유성에서도 인기를 지속한 예는 거의 없다. 조지의 모델이며, 그레타 가르보와의 사랑으로 유명했던 존 길버트 역시 토키(talkie, 유성영화)의 출현에 적응하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져 지내다가 서른여덟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대중은 무성영화 스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역대 최고의 뮤지컬 영화로 불리는 1952년 작 ‘사랑은 비를 타고’는 이 시대의 해프닝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영화를 보다가 든 의문점은 페피 밀러의 ‘순정’이었다. 무명에서 순식간에 인기 정상에 올라 스타가 되었음에도 끝까지 조지 발렌타인을 향한 사랑을 놓지 않았다는 것은 다분히 판타지로 보였다. “배우로 성공하려면 남과 다른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며 조지가 찍어준 애교점 때문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그 애교점을 볼 때마다 조지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거라고 했다. 유머 섞인 말이지만, 다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그렇긴 해도 이런 ‘순정’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이 흑백 무성영화에 꼭 어울리는 조합이리라. 과거의 스타를 향한 동경과 애정, 그리고 안타까움이 담긴 이런 마음이야말로 21세기에 흑백 무성영화를 탄생시킨 ‘고상한 마음’이 아니겠는가. 고요함이 그리운 시대, 선물과도 같은 이 영화의 아름다움에 한껏 젖어보시기를.

시인·심리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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