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느림의 미학

  • 원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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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15   |  발행일 2019-06-15 제23면   |  수정 2019-06-15

시간은 계량적 단위이지만 개개인의 주관에 좌우되는 심리적 단위이기도 하다. 시간은 한마디로 청개구리다. 빨리 보내고 싶으면 느리게 가고, 좀 더 오래 붙잡고 싶으면 빨리 가 버린다. 어렸을 때에는 나이를 빨리 먹고 싶어하니 더디게 간다. 반대로 늙어서는 나이를 천천히 먹고 싶어하지만 휙 지나가 버린다. 나이 들면 세월이 헛 흐르는 소리가 빈 벌판의 바람소리처럼 들린다고 했다. 시간은 공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시골에서 살아보면 도시보다 시간이 늦게 간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사람들은 맑은 공기·물도 좋지만 인생을 길게 살기 위해서 시골로 귀촌하는지도 모른다.

‘느린 우체통’이 새삼 부각되고 있다. 3~4일 이내에 배달되는 일반 우편물과 달리, 관광지에 설치된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은 일정 기간(6개월~1년)이 지나야 도착한다. 느린 우체통은 대구 중구 김광석 거리·남구 봉덕동 고산골 공룡공원·수성구 수성못·달성군 마비정 벽화마을 등 명소에 설치돼 무료로 운영되고 있다. 장소별로 특징있는 사진을 배경으로 담은 우편엽서가 비치돼 있어 손글씨로 지인이나 자신에게 보낼 수 있다. 경주 보문단지내 설치된 느린 우체통에는 한해에 4만여통의 우편 엽서가 접수된다고 한다. 매사 급속도로 처리되는 컴퓨터 디지털 시대에 색다른 면모를 제공하는 아날로그 방식이다. 아날로그적 느린 감성이 첨단시대에 먹혀들고 있다고나 할까.

이처럼 ‘느리게 살기 미학’을 추구하는 도시나 시골 마을들이 최근 들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민간에서 주도하는 범지구적 운동인 ‘슬로 시티’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슬로 시티는 전통 마을의 보존·생태 환경 지향·지역민 중심 등 느림의 가치를 준수하면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한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전남 담양군 창평면, 완도군 청산도, 신안군 중도 등 슬로 시티 선정 지역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거주 인구가 5만명 이하이고, 자연생태계가 보전되어 있어야 하며, 지역주민의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지역들이다. 또한 유기농법으로 생산되는 지역 특산물이 있어야 하고, 대형마트나 패스트 푸드점이 없어야 선정이 가능하다. 속도와 생산성만을 강요하는 ‘패스트 시티’에서만 살다가는 병을 얻을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다들 ‘느림’을 갈구하게 된다. 원도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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