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말이 쌓이면 이념이 된다는데

  •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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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19   |  발행일 2019-06-19 제31면   |  수정 2019-06-19
20190619

‘멋지게 놀고 나온 선수들 자랑스럽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U-20 월드컵 결승전 직후 SNS를 통해 남긴 메시지의 제목이다. 살짝 고개가 갸웃했다. ‘놀고 나온’ 표현에서다. 원래 정정용 감독이 시합전 최고조의 긴장에 놓인 선수들에게 했던 말이다. 대통령의 진의는 주눅들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는 덕담이었지만, 선수들은 실제 전투에서 놀고 나오지는 않았을 게다. 시합 전후 시점의 말은 다르고, 당사자(감독)와 관전자의 말은 다른 것이 상식이 아닐까. 물론 대통령의 메시지는 대통령의 작문 그대로는 아니다. 써주는 보좌진이 있다고 짐작한다.

문 대통령이 지난 6일 현충일 기념사에서 읽은 ‘약산 김원봉’의 여진이 크다. 문 대통령은 ‘애국 앞에 진보와 보수가 없다’며 약산을 언급했다. 약산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이어 국군창설의 뿌리, 한·미동맹의 토대란 논리를 전개했다. 논란이 컸다. 김원봉은 누구인가란 역사공부가 불타올랐다.

인간 김원봉을 논한다면 그처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이도 드물 것이다. 영화나 소설을 뛰어넘을 듯하다. 그는 제국주의 일본을 ‘강도’라 칭하고 멸살해야 할 적으로 여겼다. 무정부주의자로 무장투쟁 테러만이 조선의 독립을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악질 일본순사에서 광복 후 경찰로 변신한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분에 못이겨 북으로 갔다는 일화도 있다. 잘 생긴, 자존심 높은 듯한 그의 사진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가 독립투사였다는 점은 명백하지만 월북 후 그의 행적은 불행히도 ‘애국(愛國)과 보훈(報勳)’의 경계를 넘었다. 북한정권 수립에 가담했고 국가검열상, 노동상에 올랐다. 그는 6·25 동족상잔의 북측 리더가 됐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조국해방전쟁(6·25)의 공헌으로 김일성의 노력훈장까지 받았다. 300만명이 희생된 6·25전란을 격발한 공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國)’과 척을 졌다. 약산이 민족을 사랑했는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이란 국체를 애국했다는 증거는 없다.

문 대통령이 영화 ‘암살’을 보고 김원봉의 행적을 아쉬워하며 훈장 하나 달아드렸으면 한다는 말은 어렵지 않게 공감된다. 좌파 혹은 공산주의 계열의 비극적 독립투사들이 오늘의 대한민국과 함께 하지 못한 역사의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말은 현충일이란 시점과 국립현충원이란 장소에 결례를 범한다. ‘안타깝다’ 정도로 그쳐야 할 대목에 장황한 역사해석까지 보탠다면 다른 저의(底意)가 있다는 의심이 나올 수밖에 없다. 보훈처 산하에 무슨 위원회가 비밀조직처럼 약산의 서훈을 추진했다고 하는 소리도 들린다.

문 대통령의 묘한 발언은 또 있다. 최근 스웨덴 방문시 그쪽 의원들과 담화에서 나왔다. 문 대통령은 “한국은 미국식 발전 모델에 따라 높은 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그만큼 심각한 양극화가 생겨나는 등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고 청와대 대변인이 밝혔다. 성장과 양극화는 지구상의 화두인데 고개가 갸웃거린 대목은 ‘미국식’이다. 미국식과 양극화의 인과관계는 어디까지 타당할까. 기실 역대 한국의 압축·고도성장은 미국식이 아니다. 미국도 반대한 ‘개발독재’ ‘재벌’로 표현되는 하향식이었다. 그게 성장을 이끌었고 우리의 밑천이 됐다. 밑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창의와 개인의 능력을 거의 무한대로 인정하면서 자본주의를 구축해온 미국식과는 차별화된다. 양극화, 이는 미국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나라 규모가 크면 양극화는 비례한다. 10명이 모여 살면 부의 차이는 적지만, 이게 1만명, 1천만명, 1억명으로 불어나면 격차는 커진다. 평등의 공산주의를 한다는 14억 인구 중국을 보라. 그쪽 양극화가 미국보다 덜하다는 증거가 없다. 사회주의적 북유럽 시스템을 내심 띄워주는 의도였다 해도 뜬금없이 미국을 끌어들이는 외교무대 발언에 아찔함이 밀려온다.

대통령의 말은 섬세해야 한다. 일상의 우리도 그렇지만 거둬들일 말이라면 지도층이나 VIP는 더 신중해야 한다. 말이 쌓이면 이념이 된다. 문 대통령의 말을 종합해서 ‘좌파’라고 우려하는 이들이 있다. 좌파가 나쁜 것은 아닐지언정 스스로의 정치 정체성은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야 관전하는 이들이 헷갈리지는 않을 것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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