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성지 상주 .3] 상주북천전투와 임란북천전적지(하)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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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24   |  발행일 2019-06-24 제12면   |  수정 2019-06-24
민초 800여명,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1만7천명에 맞서 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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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임란북천전적지 내부에 충렬사유허비, 권길·김종무·박걸 순국비, 박걸 순절단이 나란히 서 있다.(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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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로 향하는 외삼문 앞 광장 한편에 각각 북천전투의 3충신(忠臣)과 2의사(義士)로 꼽히는 종사관 윤섬·이경류·박호, 의병장 김준신·김일의 순국비가 나란히 서 있다.(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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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임란북천전적지 전시관 내부. 전시관에는 북천전투 관련 자료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의 무기류가 전시돼 있다.

빠르게 북상하는 왜군에 조선 관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상주에 배수진을 치고 일전을 준비한다.<영남일보 6월10일자 12면 ‘상주북천전투와 임란북천전적지(상) 참고>. 전황은 매우 불리했다. 특히 순변사 이일이 이끄는 조선 중앙군은 60여 명뿐. 1만7천여 명의 왜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상주에서 800여 명의 민초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일어나 의병으로 나선다. 하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화력에 전세는 급격히 악화된다. 결국 순변사 이일은 도주하고 상주 판관 권길, 사근도 찰방 김종무, 의병장 김준신 등과 상주 의병들은 죽기로 맹세하고 분투하다 순국하고 만다. ‘호국의 성지 상주’ 3편은 ‘상주북천전투와 임란북천전적지 상편’에 이어 당시 북천전투에서 벌어진 치열한 격전과 민초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1. 오직 뜻 하나로 모이는 백성들

대구가 이미 왜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첩보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지체 없이 길을 틀었다.

“대구를 포기하고 상주로 진군한다. 상주에서 일전을 치를 터.”

하지만 4월23일, 상주에 도착한 이일은 망연자실했다. 도성을 떠나기 전, 경상도 11개 역의 찰방들에게 역마 동원령을 하달했음에도 군사를 이끌고 나타난 이가 사근찰방(沙斤察訪) 김종무(金宗武) 단 한 사람인 까닭이었다.


순변사 이일의 중앙군은 60여 명
의병 김준신 등이 나서 백성 설득
함창 관군 합세 800여명으로 늘어
사력다했지만 倭 화력에 전세 악화
패전 확신한 이일 말머리 돌려 도주
아비규환 속 의병 속수무책 쓰러져



“이래서야 군사들은 어찌 이동하고 군수품은 또 무슨 수로 옮긴단 말인가.”

그뿐이 아니었다. 상주 읍내가 텅 비어있다시피 했다. 혼자 남아 행정을 처리하고 있던 판관(判官) 권길(權吉)이 이일 앞에 예를 갖췄다. 이일은 대노했다.

“이 지경이 되도록 무얼 하고 있었더냐. 내 너를 참하리라.”

말은 그렇게 했어도 군사 하나가 귀한 때였다. 게다가 의병으로 나선 김준신(金俊臣)이 적극적으로 말렸다.

“하루만 말미를 주십시오. 사방으로 흩어진 군사와 읍민들을 찾아 모아오겠습니다.”

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장(裨將) 변유헌(卞有獻)에게 일렀다.

“자네가 책임지게.”

“예. 장군.”

이에 변유헌을 비롯해 권길, 김준신, 김종무 등이 다급하게 길을 나섰다. 백성들이 숨어있을 만한 곳이면 산이 아무리 깊어도 개의치 않고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간절한 설득이 이어졌다.

“돌아들 오시오. 조선 제일의 장수가 상주에 왔소. 나라가 위태로우니 힘을 보태야 할 때요.”

“현재 왜군은 대구에서 더 이상 북상하지 않고 있으니 너무 불안해들 마시오.”

“왜군의 전력에 대한 소문도 심히 과장돼 있소.”

백성들은 술렁였다.

“조선에서 제일가는 장수가 상주에 왔다는군.”

“중앙군이면 아무래도 다르지 않으려나.”

“우리가 힘을 보탭시다.”

“나 혼자라면 도망가고도 남겠으나 함께인데 겁날 것이 없지.”

백성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모습이 다른 한 사람을 불러냈고, 이 사람의 기운이 다른 사람의 기운을 북돋웠다.

“갑시다. 우리가 해봅시다.”

길이 가득 메워졌다. 지난번엔 상주를 벗어나는 인파였다면, 이번엔 상주로 향하는 인파였다. 그리고 여기에 함창의 관군이 합세하면서 인원은 800명 가량으로 늘어났다.

#2. 아, 통한의 북천

4월24일, 이일이 지휘하는 중앙군과 권길, 김준신, 김종무 등이 포함된 상주관군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1천여도 안 되는 소수 병력으로 1만7천여 명에 가까운 대군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읍성 사수가 먼저입니다.”

이것이 상주관군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중앙군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 넓은 평야에서 기마전으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

함경도에서 여진족과의 숱한 전투를 통해 명성을 쌓아온 이일에게는 그 방식이 익숙했던 것이다. 양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맞섰지만, 이일의 강경한 주장에 상주관군은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에 군사들은 북천으로 이동해 진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시가 급하다. 훈련을 서둘러라.”

대장기가 휘날리는 북천 냇가에서 군사훈련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상주관군의 태반은 일반 백성으로 이루어진 의병이었다. 전투에 경험이라곤 없어 무얼 해도 어설펐다. 하지만 오직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뜻만으로 모두가 사력을 다했다.

바로 그 시간, 왜군의 척후병들은 이미 상주의 남쪽 장천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4월25일 동트기 전의 새벽에는 북천마저 건너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들은 지휘부가 서둘러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회의를 마치기도 전에 왜군의 포위에 이어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막아야 한다. 겁먹지 마라.”

순간 왜군 조총부대로부터 일제사격이 가해져왔다. 총이 발사될 적마다 천둥이 진동하고 우박이 날리는 듯했다. 조선의 기병들이 말을 탈 틈조차 없을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궁수들이 서둘러 활로 응사했지만 화살은 왜군의 대열에 미치지도 못하고 떨어져버렸다.

“버텨야 한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불가능이었다. 왜군은 갑옷에 장검과 창으로 무장하고 말까지 동원한 백전노장들이었다. 맨몸이나 마찬가지인 의병이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아비규환 속에서 아까운 목숨들이 연달아 쓰러졌다. 옷깃에 이름을 써놓고 하인에게 ‘내가 죽거든 이것을 징표로 삼아 나를 거두라’고 이른 뒤 뛰어든 권길. 시종에게 손부채를 주면서 ‘나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니 너는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 집안사람들에게 알려라’ 한 김종무. 나라에서 정식으로 임명된 관리가 아님에도 전장의 선봉을 달린 김준신. 그리고 이름 한 자 남기지 못한 수많은 의병들.

“끝났다.”

패전임을 확신한 이일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안 그래도 간당간당하던 대열이 완전히 무너졌다. 전투는 그렇게 허망하게 끝이 났다.

#3. 효녀각, 그 원통한 흔적

살아남은 자들의 처지도 비참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왜군이 온 산을 뒤지며 약탈을 시작한 까닭이었다. 알몸에 유혈이 낭자한 몰골로 더 깊은 곳을 찾아드는 백성들로 골짜기가 꽉 찰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길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의병장 김일(金鎰)의 아내와 열일곱 살 된 딸 그리고 몸종이었다. 딸은 아버지의 죽음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아, 아버님. 제가 반드시 모셔갈 거예요.”

전장에 도착하니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고 피가 물처럼 흘렀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에 휩싸였지만 딸은 곧 김일을 찾아 나섰다.

“아버님. 어디 계십니까.”

그러기를 사흘째, 마침내 김일의 시신을 찾아냈다. 절통한 마음으로 통곡하는데 왜군이 나타났다. 결국 그 자리에서 어머니까지 잃은 딸은 죽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을 달리 먹었다.

“아니다. 이리 죽어서야 원통함만 더할 뿐. 부모님의 마지막을 지켜야 한다.”

그러곤 어머니 시신은 자신의 등에 업고, 아버지 시신은 몸종의 등에 업힌 다음 집이 있는 장천(현 낙동면 화산리)으로 향했다. 밤새 30여 길을 걸어가는 내내 숨죽여 흘린 피눈물이 길을 적셨다. 결국 딸은 부모님을 옥산 뒷산에 안장하고서야 마음 놓고 곡하며 시묘를 준비했다. 무남독녀로 태어나 세상에 오로지 부모님밖에 없던 딸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집안에서 반대했다.

“아녀자가 시묘라니. 이는 예법에 없다.”

애통방통해도 어쩔 수 없었다. 대신 3년 상에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 속을 달랠 뿐이었다. 하지만 시집을 가고 세월이 흘러도 한이 가시지 않았다.

“아버님의 충심이 높아 하늘을 찌른 것도 모자라 우주에 닿았는데도, 그 뒤를 이를 후손이 없으니 참으로 망극하구나.”

나라에서도 이 사실을 알았다. 김일에게는 통훈대부사헌부집의를 추증한 후 충의단에 입향했고, 김일의 딸에게도 정려하여 그 공을 기렸다. 바로 상산김씨효녀각(商山金氏孝女閣)이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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