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가정의 품격, 정답은 없다

  • 원도혁
  • |
  • 입력 2019-06-24   |  발행일 2019-06-24 제31면   |  수정 2019-06-24
[월요칼럼] 가정의 품격, 정답은 없다
원도혁 논설위원

얼마전 한 미혼 남자 연예인의 새로 이사간 집이 TV방송에 소개됐다. 혼자 사는 이 남자 연예인은 특이하게도 신발을 수집하는 ‘신발 마니아’였다. 집 거실 양쪽 벽을 가득 채운 형형색색 다양한 스타일의 신발은 가히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한계는 거기까지. 호기심은 충족되면 금세 끝나게 된다. 세계 각국에서 생산된 수백 켤레에 달하는 신발은 이채롭기는 하지만 방문객이나 시청자들에게는 한순간 눈요기로 끝나는 전시품에 불과하다. 좀 색다르고 특이한 애장품일 뿐이다. 신발에 내재한 품격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가정에 대한 품격을 논할 때 서재와 예술품을 거론한다. 수준 이상의 많은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는 집에 가보면 풍기는 기품과 격조는 높다. 책이 없는 집이 주는 분위기와 아주 다르다. 또한 벽에 멋진 그림이나 글씨, 또는 고상한 조각품 등 예술품들이 장식돼 있는 집도 마찬가지다. 바이올린이나 플루트와 같은 악기를 다루는 주인의 집도 그 악기가 제자리에 있을 때 품격을 인정받는다.

필자의 지인들 중에는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가 있고, 자신은 한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와의 식사자리에서 캐나다의 문명에 대해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데 확실히 선진국다운 면모를 느끼게 해주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캐나다는 나라가 아주 넓어 집들도 엄청나게 크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집의 규모뿐만 아니다. 캐나다 현지인 집에 초대돼 가보면 집마다 거실과 방에 부모·조부모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는 것이다. 다들 느꼈겠지만 초상화는 표정이나 풍기는 분위기가 온화하고 근엄해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게다가 집 책장에는 여러 종류의 책들이 많다는 점도 우리와 다른 점이다. 물론 외지인을 초청할 정도의 가정이라면 교육 수준이나 사회적 지위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안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이기 쉽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떤가. 부(富)를 물려 받았거나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크고 넓은 집에 사는 것은 비슷하다. 그런데 그 흔한 책장에 싸구려 서적들만 몇 권 있을 뿐 수준 높은 명저를 보기 어렵다면 어떨 것인가. 실제로 책이나 그림·붓글씨 작품 한 점 없으면서 집 사이즈만 큰 가정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 거실 장식장엔 금 두꺼비와 같은 귀금속, 장식용 대검이나 비싼 쇠붙이가 즐비하고, 고급 양주로 가득차 있는 경우를 본다. 그 가정에 대한 존경심이 떨어지면서 실망감이 엄습하는 순간이다. 고대 로마의 사상가 키케로는 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책이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육체’라고 일갈했다. 책도 책 나름이다. 여러 종류의 전집들을 가득가득 채워놓은 서가는 그냥 가진 자의 전시용 책장으로 해석되기 십상이다. 그보다는 다양한 인문학 서적과 전문 서적, 소설책 등이 골고루 구비돼 있다면, 거기에다 주인이나 가족이 한권 두권 사서 제대로 읽어보고 꽂아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한순간 되는 일이 아니고 차곡차곡 시간과 내공이 쌓여야 하는 일이어서 그런 책장이 훨씬 더 가치있어 보인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다만 소양이 저급한 하층민과 졸부들만 모를 뿐이다. 그래서 전집류를 왕창 사들여 돈으로 한방에 해결하는 일도 이전에는 적지 않았다.

그렇거나 말거나 부여된 생은 각자의 몫이다. 유한의 삶을 영위하는 방식은 ‘정답’이 없으므로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품격이 떨어진다고 해서 특정한 삶의 형태를 함부로 비난해서도 안 된다. 장식장·책장에 수준 높은 책이 꽂혀 있건, 금두꺼비와 고급 양주가 들어차 있건, 선택과 기호는 집주인 마음이다. 고급 전집들을 박스째 사들여서 그야말로 장식에만 신경 쓴 집도 나름대로 다른 장점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인생에는 세가지가 있고 세가지가 없다’고 선각자가 정리했다.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인간’이 있다고 했다. 이것이 존재하는 세가지다. 세상에 없는 것 세가지는 ‘공짜’ ‘비밀’ ‘정답’이다.
원도혁 논설위원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