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비스트’ 유재명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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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28   |  발행일 2019-06-28 제43면   |  수정 2019-06-28
“내안의 괴물은 연기에 미쳐 가족·여행·일상 놓치고 모질게 살아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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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고 싶은 놈을 잡는 게 아니라 범인을 잡아야지.” 원칙과 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강력 2팀장 민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범인을 검거하는 강력 1팀장 한수(이성민)와 사사건건 대립한다. 하지만 민태 역시 겉은 차갑지만 속은 알 수 없는 욕망으로 들끓고 있다. 영화 ‘비스트’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인마를 잡기 위해 대립하는 두 형사의 이야기를 그렸다. 민태 역으로 그 한 축을 담당한 유재명은 “안개 속에 가려진 듯한 그를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는 점을 ‘비스트’의 매력으로 꼽았다. 하지만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연극을 포함해 20년 가까이 연기에 몸담고 있는 그에게도 이번처럼 캐릭터가 명료하게 다가오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보통 시나리오를 읽으면 ‘이런 인물이구나’라는 걸 알게 되는데 민태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를 알아갈수록 더 의문점이 생겼고, 그 점이 새롭고 흥미로웠다.” 유재명은 민태를 움직이는 욕망의 근원을 결핍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불투명한 상태였던 그를 자신만의 영화적 화법을 통해 클리셰가 존재하지 않는 결이 다른 인물로 창조했다. “민태를 감싸고 있는 안개를 걷어 버릴 것”이라는 의욕과 호기심으로 시작된 그의 인물 탐구는 결과적으로 흡인력 있게 승화돼 지금껏 보여준 모습 중 가장 존재감 있는 인상을 남겼다.

▶기존 형사물과 차별화된 접근이 인상적이다. 어둡고 묵직했던 고전 프랑스 누아르의 정서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본다면 분명 새롭게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 말씀하신 것처럼 익숙한 소재와 이야기 구조지만 색달랐다. 결과물 역시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의 느낌보다 훨씬 깊고 묵직하게 나왔다. 범죄 스릴러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형사물이 상업적인 틀 안에서 범인을 잡는 형사들의 고군분투와 애환을 다룬다. 하지만 ‘비스트’는 그 흔한 회식장면 하나 없고 주인공들은 지독히 현실적인 인간에 가깝다. 익숙함이 아닌 다른 결의 작품을 뽑아내기 위해 감독님을 포함한 많은 분들의 고민과 열정이 일궈낸 뜻깊은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20190628

살인마 검거 방식 대립하는 두 형사
누구와도 소통 못하는 외로운 인간
직업에 대한 신념·열정만은 뜨거워
웃음 코드 하나 없이 밀어붙인 광기
눈빛·태도 디테일한 표현 쉽지 않아

감독이 친근·유머러스한 모습보다
드라마 ‘비밀의 숲’캐릭터에서 발견

과부하 걸릴 만큼 다작 출연 ‘숙명’
무명시절 꽤 길었지만 꿈 같은 시기
우상인 이성민 선배 최고의 파트너
사랑이든 일이든 솔직한 것이 중요
멋있는 작품엔 언제든 뛰어들 각오


▶민태는 법과 원칙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보다 큰 욕망을 간직한 인물이다. 그를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했나.

“민태는 누구와도 쉽게 소통을 못하는 외로운 인간이다. 강력계 팀장 정도 되면 팀원들과 가끔 술자리를 갖고 어깨동무도 하면서 ‘야! 오늘 힘들었지’라고 격려를 하는 게 인지상정일 텐데 그는 그런 인간관계를 철저히 거세한 채 살아왔다. 다만 직업에 대한 신념과 열정만은 누구보다 뜨겁다. 단순히 성공이나 승진, 야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뭔가 확실치 않지만 그를 움직이는 욕망의 근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격적으로 결핍이 있는 민태에게 고독이라는 정서를 집어 넣음으로써 나름의 영화적 미학을 완성하려 했다. 많이 설명하기보다는 눈빛과 태도와 소소한 디테일로 이 인물의 감춰진 욕망을 표현해내는 게 중요했는데 그만큼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프랑스 영화 ‘오르페브르 36번가’(2004)를 리메이크했다. 원작은 봤나.

“보고 싶은 욕구는 있었지만 참았다. 프랑스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라 엣지있게 표현됐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과 궁금증은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우리 영화는 원작과 다른 결과물로 만들어질 것이기에 나만의 민태를 만들어가는 게 더 중요했다. 오히려 그분들이 우리 영화를 보고 어떤 평가를 내릴지 더 궁금하다.”

▶감독이 당신을 캐스팅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나도 궁금했다. 사실 내가 대중에게 알려진 이미지는 친근하고 유머러스한 모습이다. 그래서 나에게 이런 작품이 왔다는 게 신기했다. 드라마 ‘비밀의 숲’(2017)은 내 필모 중에서 가장 큰 변신이라 할 수 있는데 아마도 민태의 모습에서 발견한 것 같다. ‘같이 하고 싶다’며 나를 당겨서 안아주었다. 그렇게 민태가 어느 날 내 삶에 쑥 들어왔고 이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어느 때보다 묘한 감정이 느껴진다. 부끄럽지만 나름 해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지난해 출연작품이 7편을 넘었다. 그간 크고 작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해 다작배우로 통하고 있는데 이제 밸런스 조절이 필요할 것도 같다.

“연극하던 시절에 좋은 배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 스스로도 그걸 알고 있기에 비중에 상관없이 출연 제안을 받으면 감사했다. 그렇게 매 작품을 긍정적으로 대하고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나를 불러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도 나를 필요로 하는 멋진 작품이라면 출연을 마다하지 않는다. 멋진 작품이란 외형적인 규모나 장르의 멋짐이 아니라 내가 연기할 캐릭터가 지닌 속성이 멋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다보니 과부하가 걸릴 만큼 많은 작품에 출연하게 됐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이미지의 과소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배우의 숙명일 뿐이다.”

▶부산대에서 자연과학계열을 전공했다.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님은 내가 국립대에 들어가서 선생님이 되기를 바라셨다. 나도 비슷한 생각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그런데 우연히 ‘극예술연구회’라고 써있는 건물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들어가 봤다. 마침 리허설 중이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뭔가 운명처럼 크고 강력한 끌림이 있었다. 그렇게 대학을 10년 만에 졸업하고 눈을 떠보니 이제 마흔 살이 넘었다.”

▶자기 안의 ‘비스트’가 있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

“연기에 미쳐서 다른 관계를 전혀 맺지 못했을 때다. 가족과의 관계는 물론 여행, 일상, 경제적 안정 등 나에게 줄 수 있는 선물 같은 시간을 주지 않고 모질게 살았다. 대신 연기하는 선후배들과 술자리에서 아름답고 멋진 예술을 한다는 것에 도취돼 괴물처럼 무식하게 그것에만 천착했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내 무명시절이 남들이 느끼기엔 길고 지난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나에겐 꿈같은 시기였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힘든 시간이었다. 지금은 감사할 정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래서 ‘변하지 말자’고 나 스스로에게 늘 주문을 건다.”

▶이성민 배우와는 첫 호흡인데 어땠나.

“성민 선배는 오래전부터 내 우상이었다. 영화 ‘고고 70’(2008)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드라마 ‘미생’(2014) 역시 기가 막혔다. 그런 선배와 이번에 합을 맞추게 됐으니 얼마나 긴장되고 떨렸겠나. 선배가 존경스러운 게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더 열정적이고 열려있고 지독하게 (연기를) 잘한다. 역시 선배는 선배였다. 무엇보다 책임감과 부담감을 안고 자기의 역할을 해내는 힘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그 역할을 해낸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보면서 여실히 느꼈다. 나 역시 그런 길을 잘 따라가고 싶었고, 역할로 봤을 때 선배의 집중력과 에너지를 보는 것만으로 나에게는 큰 리액션이 바로 나오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뭘 해석하지 않더라도 선배의 눈을 보면 바로 나왔다.”

▶‘비스트’는 어떤 영화라고 생각하나.

“시종 끝도 없이 밀어붙이니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영화는 지독히 현실적이고 인간본성에 관한 영화다. 일반적인 형사물과 달리 총 한번 제대로 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얘기를 한다. 그런 인물들의 내면과 광기를 조미료 하나없이, 그 흔한 웃음 코드 하나없이 밀어붙인다. 개인적으로 웃음이 있는 따뜻한 영화를 좋아하지만 어떨 때는 착잡하고 까끌까끌한 영화를 봤을 때의 쾌감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비스트’가 바로 그런 영화라고 생각한다.”

▶민태의 모습이 궁금했다고 했는데 그 해답은 찾았나.

“악몽같은 꿈을 꾸고 나서 제일 먼저 찾는 게 시원한 물이나 공기인데 그런 느낌이다. 혹시 내 안에도 민태처럼 관계 맺지 못한, 스스로는 신념이라고 믿지만 철갑을 두른 듯한 방어태세의 뭔가가 있다면 걷어 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로 무장해제를 하고 사랑이든 일이든 솔직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아마도 나에게 해당되는 말일 수 있다.”

▶부산에서 ‘배관공’(배우, 관객 그리고 공간)이란 극단을 운영했다. 연출에 대한 꿈도 있을 것 같은데.

“연극 연출은 경험이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됐다. 그 일을 하면서 주변에 알려지지 않은 좋은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연기는 물론이고 주어진 일상을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그들과 소박하지만 작은 무대를 서울에서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다. 그간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아직 실행에 옮길 여유가 없었는데 꼭 해볼 생각이다. 영화 연출은 아직 내 깜냥이 안되지만 기회가 된다면 단편 영화는 해보고 싶다.”

▶어떤 배우로 대중에게 기억되고 싶은가.

“배우는 어떤 면에선 좋은 직업이지만 한편으로는 되게 고통스러운 창작자이다. 그래도 내가 선택해서 고민하고 노력한 결과물로 대중과 소통하는 과정이 즐겁다.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힘들게 완성해놓고 겨우 한숨 한번 돌리면, 다시 하고 싶어 미친듯이 달려들게 된다. 난 작품주의자로 기억되고 싶다. 때문에 내가 정한 기준으로 다른 결이 느껴지는 멋있는 작품이라면 어디든, 누구든 가리지 않고 고통속으로 뛰어들 각오가 돼 있다. 그렇게 마음껏 연기를 펼치고 어느날 조용히 사라지는 게 배우로서 꿈이자 목표다.”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제공=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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