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윤 칼럼] 판문점의 세 頂上

  • 이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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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05   |  발행일 2019-07-05 제23면   |  수정 2019-07-05
20190705
논설실장

세계 정치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질문 내용은 ‘현존 국가지도자 중 대화하기 가장 까다로운 상대는?’이다. 이 오명(汚名)의 명부(名簿)에는 누구의 이름이 오를까.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트럼프와 김정은의 이름이 꼽히지 않을까. 40살 가까운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닮은 구석이 너무 많다. 모두 강한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소유자다. ‘톱 다운’이란 비핵화 협상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욱’하는 성격이나 좌충우돌, 다혈질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다. 인류 보편적 가치나 일반의 상식과는 다른 비주류적 정치신념을 가진 것도 비슷하다. 이는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천재라거나 쾌도난마식 해결사라는 과잉 찬사로 가끔 포장된다. 하지만 즉흥적 행동가의 이면(裏面)일 뿐이다. 앞에서는 미소 짓지만 뒤에서는 비아냥거림을 받는 것을 당사자만 모르는 것도 닮은꼴이다. 한쪽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최강국임을 자부하지만 다른 한쪽은 현대사 유례없는 세습 독재국가 아닌가. 그 간극을 넘어 공히 국수주의(國粹主義)적 성향을 지닌 것은 특이하다. 국부(國富)의 엄청난 격차에도 불구하고 금수저로 태어나 돈이 많은 것도 같다. 동병상련, 이심전심일까. 서로를 ‘좋은 파트너’라 한다. 상상력이 풍부한 두 사람만이 가진 독특한 개성이 있었기에 ‘기존의 외교문법으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문재인 대통령) 극적인 판문점 리얼리티 쇼를 연출할 수 있었다. ‘트윗 제안(提案)’ 수 시간 만에 전 세계 이목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정상회담이 지금껏 있었던가. 놀람과 환호에 ‘백악관에서의 커튼콜(curtain-call)’ 약속으로 화답한 것도 기상천외한 이들만의 방식이다.

판문점 이벤트의 주연은 당연히 트럼프와 김정은이다. 두 사람을 주연으로 앞세우고 조연을 자처한 문재인 대통령의 품성은 이들과 판이하다. 겸손과 배려, 양보가 몸에 배어 있다. 승부사나 갬블러 기질과는 거리가 멀다. 외향적 감성주의자인 트럼프, 김정은과 달리 내향적 이성주의자에 가깝다. 강한 원칙주의자이지만 활달하게 자기주장을 펼치기보다 남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편이다. 현실주의자라기엔 이상주의적 신념이 두텁다. 전형적 흙수저로 태어나 실패와 고난 끝에 권좌에 오른 것도 두 사람과 다르다. 트럼프, 김정은은 대화 파트너로서 문 대통령을 정직하고 합리적 인물로 평할 만하다. 그러나 답답하다고 느낄 것이다. 자신들이 갖지 못한 선(善)하고 의(義)로운 면에 이끌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루기 쉬운 샌님 정도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문 대통령 입장에서 보자. 트럼프와 김정은은 까다롭고 예측불가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궁합 불일치 파트너다. 국가대사(國家大事)가 아니면, 대통령이란 진중(珍重)한 책임감이 없다면, 자연인 문재인은 굳이 두 사람과 사귈 이유가 없다. 그런 두 사람과 함께 ‘한반도 평화’라는 대업을 완수해 가는 여정은 여간 괴롭고 힘들지 않다. 문 대통령의 행보와 언사 곳곳에서 삭이고 감내하는 내인(耐忍)의 고뇌가 묻어나는 것도 그런 연유 아닐까. 국내의 반대자들은 이를 두고 ‘패싱’ ‘종북’ ‘동맹 이탈’의 굴레를 씌워 비난한다. 안팎 곱사등 처지를 딛고 짧은 시일에 한반도를 ‘화염과 분노’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한 것의 8할은 그의 공(功)이다.

한편으로는 애처롭다. 3인 정상의 캐릭터를 근거로 체첩(體貼)하건대, 앞으로도 양보하고 상처받고 손해 보는 쪽은 문 대통령일 것이다. 기버(giver·주는 걸 즐기는 사람)의 본성이자 운명이라 할까. 순도 100%의 테이커(Taker·받으려고만 하는 사람) 본성을 지닌 트럼프와 김정은. 두 싸움닭과 벌이게 될 기버 문재인의 ‘비핵화 전투’가 걱정이다. 그러나 논리적 설명은 마땅찮지만 기버가 테이커의 호구가 되지 않고 역사는 결국 기버의 승리로 귀결되더라는 오묘한 섭리에 위로를 청한다. 삼국지가 조조 아닌 유현덕의 히스토리가 된 것처럼, 세계 유수의 정치 경제 지도자들이 기버들로 채워진 것처럼, 세 정상의 한반도 평화 여정이 결국엔 문재인 히스토리로 기록되길 기대한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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