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수학의 정석’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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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10   |  발행일 2019-07-10 제31면   |  수정 2019-07-10
[영남시론] ‘수학의 정석’과 의사

교육계가 자사고 논란으로 시끄럽다. 그런데 많은 자사고 중에서 특히 전북의 상산고가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설립자가 수학 참고서 중 베이비붐 세대 때부터 대를 잇는 스테디셀러라고 정평이 나 있는 ‘수학의 정석’ 저자이고, 그 학교 한 학년 정원 360명 중에서 276명이 의과대학을 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그 책 덕택에 나 역시 여태껏 의사노릇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으나 그 책은 홍성대라는 수학자의 독창적 저술이 아니라 일본 수학책을 베끼거나 변형해서 유형별로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시절 일본 ‘것’들에 대한 표절·모방이 어디 그 책뿐일까. 우리 세대의 고교생들이 보던 영어 수험책 중 ‘영어의 왕도’니 ‘영문해석 1200제’ 따위의 내용은 물론 제목까지 일본 수험서를 그대로 베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고, 베이비붐 세대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도깨비 형상은 일본의 만화영화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요즘도 교수들이 남의 논문을 베끼거나 제자의 논문까지 가로채서 연구비까지 타 드시는! 세상인데, 아무 생각 없이 김동환·서정주·모윤숙 같은 친일 문학인들의 시를 달달 외워야 했던 1970년대 고교생들은 ‘수학의 정석’이 일본책을 참고했는지 표절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대학만 가면 되었으니까.

한국사회에서 입시는 수학이, 취업은 영어가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상산고는 한국의 입시수학을 대표하는 책의 저자가 설립한 자율형 사립학교다. 상산고 학생 중 재수생을 포함한 거의 절반 이상의 학생이 의과대학을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재수학원의 영향인지 학교교육의 영향인지도 불분명하지만-그 학교가 자율고로서 가진 재량권을 활용하여 학생들을 입시를 위한 수학수업에 몰입시킨 결과가 아닐까.

우리나라 입시제도는 수학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의과대학이 싹쓸이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수학의 귀재들이 6년 뒤 의대를 졸업할 무렵이 되면 대부분 수학바보가 된다. 정작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수학은 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수학재능이 필요한 통계분석 같은 것도 컴퓨터가 알아서 처리한다. 진료비 계산? 중졸 정도의 학력만으로 되는 일인데도 수학의 귀재들만 모여 있는 의료기관에서 진료비 착오로 인한 소비자 분쟁은 일상 다반사다.

반면에 의대교육 현장에서는 의대생들의 인문학 소양이 모자라네 어쩌네, 의료윤리와 인성 교육을 강화하고 학생선발과정에서도 인성을 우선시해야 되네 어쩌네 법석을 떨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사회 각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수학재능이 풍부한 인재들의 집단소진을 불러온다는 것 아니겠는가.

고교시절 수학의 귀재들이 의사가 된 뒤 인간의 몸과 그 몸이 꾸려가는 삶이 ‘2+2=4’라는 공식만으로는 설명이 되지도 않고, 답이 될 수도 없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몇 해 전 대한의사협회에서 시행한 전공의 실태조사에서 조사대상 전공의 10명 중 2명이 자살충동을 느꼈다는 보고가 있었고, 실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도 종종 일어나고 있다. 혹독한 노동조건에다 폭언·폭행이 난무하는 의료계의 조직문화가 끼친 영향이 가장 크겠지만 한때 수학의 귀재였던 그들이 수학공식이나 수학적 사고만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 세상사 앞에서 무너지고 절망한 탓이 아닐까.

자녀를 의사로 만들려는 부모들의 심중에는 심각한 고용불안의 시대에 내 자식만은 늙어 죽을 때까지 해먹을 수 있으리라는 희구심리가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일정 연령이 지나면 운전면허증도 반납하게 해야 한다는 시대에 의사면허증의 효력이 앞으로도 종신까지 보장될 것이라는 전망도 불투명하지만, 설령 의사노릇을 죽을 때까지 해먹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의사가 죽을 때까지 갖추어야 할 실력은 수학실력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학귀재들을 불러 모아 수학바보의 길로 내모는 기형적 교육으로 유명세를 탄 자사고가 과연 공교육 체계에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길거리에 넘쳐 나는 게 수학학원인데.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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