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박생광 ‘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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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12   |  발행일 2019-07-12 제39면   |  수정 2019-07-12
연못에 누워있는 여인과 화려한 외모 뽐내는 원앙…폭염보다 뜨거운 색채의 환희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박생광 ‘누드’
박생광 ‘누드’, 종이에 수묵채색, 34.5X46.9㎝, 1983년.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박생광 ‘누드’

내고(乃古) 박생광(1904~1985)은 채색화로 일가를 이룬 화가다. 채색화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고려 불화에서 우리 민족의 강렬한 포스를 발산한 그림이다. 수묵 위주의 문인화가 주류를 이루던 조선시대에도 감로탱화와 괘불탱화, 민화에서 채색화는 빛을 발했다. 색동이 우리 옷의 모태이듯 그는 우리 고유의 채색화를 계승 발전시켰다.

박생광은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열 살 때, 진주보통학교에서 평생지기인 이찬호(청담 스님)를 만났다. 승려가 되고자 이찬호와 함께 절에 갔지만 하산했다. 1917년 진주농업고에 입학한 그는 재학시절 일본인 미술교사의 추천으로 1920년 일본 교토로 건너갔다. 1923년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현재 교토조형예술대학)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그 후 도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1935년 도쿄에서 조직된 ‘신미술인협회’에서 활동했다. 1938년에는 ‘자유미술가협회’ 공모전에 입선하고, 이중섭·김환기·유영국 등과 함께 작품 활동을 펼쳤다. 광복 후 고향인 진주에 정착해 민족성이 강한 작품을 제작하며 작업에 매진했다.

그는 고향에만 있지 않았다. 1967년에 상경해 홍익대에 출강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화가 천경자(1924~2015)는 박생광에 대해 “선생 키보다 큰 5백호가량의 두루마리를 찾으러 온 선생을 표구사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다. 어디서 그런 대작을 하실 정력(精力)이라기보다는 영력(靈力)이 솟았는지”라며 놀라워했다. 박생광의 예술정신은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됐다.

박생광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주제를 강렬한 채색으로 승화시켰다. 불교와 무속신앙, 민화, 역사물에 집중하며 가장 한국적인 것에 몰두했다. 그런 작품은 소재의 변형과 원색의 채색이 화면을 장악하는 대작 위주였다. 부처와 단청, 사찰의 문살 등 불교의 색채가 강한 ‘청담스님’(1983), ‘혜초스님’(1983), ‘토함산 해돋이’(1984) 등을 그렸으며, 부처와 누드를 결합한 작품도 제작했다. 역사의 충격적인 사건을 주제로 한 ‘명성황후’(1983)와 ‘전봉준’(1985) 등 역사물 시리즈를 발표하는가 하면, 무속신앙을 소재로 한 ‘무당’(1983)이나 민화에서 차용한 모란과 동물을 표현하기도 했다.

소설가 이병주(1921~1992)는 “어떻게 한국화에 그처럼 강인한 선이 가능할 수 있는가. 한국적 전통에 그처럼 색의 범람이 있었던가. 원근법을 무시한 박생광의 수법엔 그런 함의가 전연 없다. 세부묘사의 생략이 아니라 대담한 끊어버림인 것이다. (중략) 여기엔 언어로선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철학이 있었다. 피카소의 추상은 그림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는 철학, 또는 사상의 극한을 향한 지향”이라며 박생광의 작품세계를 극찬했다.

미술사가 김원룡(1922~1993)은 “그의 그림이 한국화의 정적(靜的) 세계를 깨고 힘센 동감(動感)으로 넘치고 있는 것은 화면 전체를 누비며 꿈틀거리는 철선 같은 선들과 진한 감청(紺靑), 황(黃), 주(朱)의 삼색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대조, 그리고 섬뜩하게 보이는 백색의 악센트 등 시각적 효과도 작용하고 있겠지만 작가의 굳센 구도자적(求道者的) 정신자세의 경지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누드’(1983)는 연꽃이 핀 연못에 한 쌍의 원앙이 서로 마주보는 가운데 여인이 누워 있는 작품이다. 여인은 화면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하늘에는 새가 연밥을 쪼아 먹는 중이다. 청색 바탕에 사물의 테두리를 붉은색 선으로 처리했다. 원앙은 황색과 적, 청으로 표현해 화려한 외모를 뽐낸다. 여인은 흰색으로 강렬하다. 녹색의 연잎과 붉은 연꽃의 대조에 힘이 넘친다. 화면 오른쪽에 ‘그대로’라는 호와 박생광의 인장이 찍혀 있다.

순우리말 호 ‘그대로’를 사용한 말년에는 한국의 정체성을 숙성시켜 파리로 향했다. 1985년 5월, 파리 그랑팔레 ‘르살롱 예술전’에 초대 출품한 것이다. 무르익은 색채와 이미지는 파리에서도 큰 호평을 받았다. 이 해에 불운도 겹친다. 초현실주의 화가 마르크 샤갈(1887~1985)과의 만남이 약속돼 있었지만 그해 3월 샤갈이 타계하자 이 세기의 만남은 불발되었고, 박생광마저 7월 여든두 살의 일기로 별세한다.

내가 그의 작품을 접한 것은 대학교 4학년 때였다. 1986년 박생광 작고 1주년 기념으로 만든 도록을 처음 본 순간, 시선을 압도하는 이미지와 채색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맛 본 경이로운 감동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동양화가 이런 컬러를 품을 수 있다니, 충격이었다. 박생광은 그림 속에서 자유롭게 노닐고 있었다.

마침 그의 전시회가 대구미술관에서 열렸다. ‘한국 근·현대미술의 대표작가 박생광전’(5월28일~10월20일)이다. 반가운 마음에 먼저 달려갔다. 찬란한 색채 앞에서 나는 오래도록 서 있었다. 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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