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해골’…인간 억압하는 것들 시각적으로 형상화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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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17   |  발행일 2019-07-17 제22면   |  수정 2019-07-17
봉산문화회관 9월까지 권정호展
美유학기부터 최근작까지 소개
현대문명·구조적 모순에 질문
‘소리’‘해골’…인간 억압하는 것들 시각적으로 형상화
‘해골 87-1’(위), ‘소리 85’

마흔이라는 많은 나이에 현대미술을 공부하겠다고 떠난 뉴욕에서의 생활은 고달팠다. 오래된 기숙사의 홑창으로 여과없이 쏟아지는 자동차 경적과 노랫소리, 빗소리 등의 소음은 그를 괴롭히는 것 중 하나였다. 어느날 어슬렁거리며 학교 주변을 맴돌던 그의 눈에 길가에 버려진 작은 스피커가 들어왔다. 그 스피커는 도시의 소음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는 곧장 그것을 개인 작업장으로 들고 간다. 그리고 화판 한가운데 스피커를 붙이고 그 위로 붓질을 이어갔다. ‘소리’라는 개념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작가 권정호<사진>의 ‘소리(sound)’ 시리즈는 이렇게 탄생했다.

‘소리’‘해골’…인간 억압하는 것들 시각적으로 형상화

‘뉴욕 1985’라는 주제로 전시가 열리고 있는 봉산문화회관 갤러리에 들어서면 권씨가 1984년 당시 발견한 스피커와 철자, 악보, 나무박스 등으로 구성한 입체작업 ‘소리’가 관람객을 맞는다. 소리의 수치를 재겠다는 듯 쇠로 만든 자를 붙인 이 작품은 자신을 억누르던 소음으로 고생스럽던 뉴욕 생활의 고통과 애환이 그대로 스며있다.

전시장 정면 천장 높은 벽에는 작가의 1985년 작 ‘소리 85’도 걸려 있다. 스피커를 오브제가 아닌 이미지로 차용한 그의 대표작이다. 스피커의 이미지를 그려 넣고 그 주변에 종이를 붙여서 다시 찢고 구멍을 낸 뒤 바람에 휘날리듯 거친 붓질을 가미했다. 화면에 스피커와 깨진 유리조각을 붙이고 그 표면에 붓질을 한 또다른 회화 ‘소리’는 인간을 억압하는 소리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려는 실험적인 작품이다. 이들 일련의 소리 시리즈를 그는 ‘추상과 구상이 결합된 신표현주의 양식’이라고 정의했다.

오는 9월29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소리 작업에 이은 권씨의 ‘해골’ 시리즈도 선보인다. 세 개의 캔버스를 연결하여 그린 ‘해골 85’, 악다문 이를 드러내어 현실의 모순과 억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해골 87-1’, 석고로 본떠 만든 해골을 마치 하얀 바닥 속에서 발굴해낸 듯 설치해 놓은 ‘해골’ 등이 회화와 입체 혹은 설치 미술 형식으로 전시된다.

스피커에서 해골로 대상이 바뀌었지만 이 둘은 모두 궁극적으론 ‘형상화된 어떤 개념들’이다. 그것은 ‘무엇을 그릴 것인가’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화두에 대한 작가의 질문이자 대답이다. 스피커가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문명체라면, 해골은 사회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매개체이자 사회와 인간의 내면을 반추하는 거울이다. 더러 불편하고 난해한 작업이기도 했지만 그는 이 ‘정확한 예술적 표현’을 회피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해골이 뭐 어때서. 다들 하나씩 갖고 있는 것들이잖아.” 그렇게 그는 죽음을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삶을 이해시킨다.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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