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디아스포라 (6부) ‘대양주로 뻗어가는 대구경북인’ .1] 한국의 빛으로 오클랜드를 밝히는 유광석씨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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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18   |  발행일 2019-07-18 제12면   |  수정 2022-06-09 11:29
모험심 강했던 태권소년, 뉴질랜드 제1도시 랜드마크 빛내다

영남일보는 대구경북디아스포라 6부로 ‘대양주로 뻗어가는 대구경북인’을 총 7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역만리 낯선 타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정착하기까지, 주로 대구경북 출신의 이민 1세대들이 겪었던 도전과 시련, 성공담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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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택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유광석씨. 그는 불굴의 도전정신과 자신감, 피나는 노력으로 뉴질랜드 간판업계의 거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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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석씨가 공사를 책임진 SO호텔 벽면의 LED 전광판이 오클랜드 도심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오클랜드는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도시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 순위’에서 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기도 하다. 거주하는 사람은 150만명. 이 나라 인구의 3분의 1 규모다. 뉴질랜드 최대 도시 답게 도심은 북적이는 인파와 빌딩, 조형물이 어우러져 활력이 넘친다. 야경 역시 멋드러진다. 특히 도심을 환하게 비추는 소(SO) 호텔의 LED 전광판은 오클랜드의 새 랜드마크로 꼽힌다. 뉴질랜드 최초로 LED전광판으로 만든 옥외 설치물이란 타이틀도 달았다. 호텔 벽면에 설치된 LED전광판의 크기는 가로 18m, 세로 60m. 여기에 들어간 1만5천개의 LED 전구가 매일 밤마다 화려한 빛의 향연으로 오클랜드 도심을 수놓는다. 이 전광판 공사를 해낸 사람은 경북 시골 출신의 뉴질랜드 이민자, 유광석씨(49·다온 대표)다.

◆전교생 호령하던 태권소년

유광석씨는 예천의 한 시골마을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정형편이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는 데다, 특히 아버지가 “하고픈 거 다하라”며 적극 밀어줬다. 덕분에 자전거를 타고 읍내 태권도 도장을 다닐 수 있었다. 태권도는 천성적으로 모험심이 강했던 그에게 자신감을 더욱 불어넣었다. 과유불급이었던지, 가끔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 “초등 5학년 때 학교 가던 동네 친구 30명을 데리고 산에서 한참 놀았던 적이 있었어요. 다음 날 학교에서 난리가 났고 담임 선생님에게 엄청 두들겨 맞았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유씨는 중학생때부터 무조건 대도시로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고등학교가 대구에 있는 대중금속고였다. 마침 그 학교 교기가 태권도였기에 2단이었던 유씨는 학창시절에 ‘날개’를 달았다. 고2때 태권도 사범으로 발탁돼 1천명이 넘는 전교생을 호령하면서 훈련시켰다고. 그런 경험을 통해 탄탄하게 다진 자신감은 후일 성공의 큰 자산이 됐음은 물론이다.

◆청년기 보내고 기회의 땅으로

유씨는 고교 졸업(1990)을 앞두고 경기도 안산에 있던 열처리 업체에 실습생으로 파견근무를 했다. 첫 월급은 14만원. 졸업 후에도 그 업체에서 6개월 더 일하다가 월급이 너무 적어 그만뒀다. 이후 무작정 상경하면서 갖은 고생을 했다. 한칸짜리 방에서 친구와 자취를 하면서 굶기를 밥먹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훈제치킨과 족발 등을 만드는 식품업체의 구인 전단을 보게된 것은 행운이었다. 망설일 것 없이 곧바로 취직했다. 그가 맡은 작업은 주로 냉동 상태인 족발의 발톱을 제거하는 것. 돼지 발톱을 하루에 3천개쯤 빼야 했다. “발톱을 빼내려면 엄청 힘들어요. 종일 일하다보니 알통이 많이 생기더군요. 그 일을 1년간 했어요.”


고교때 사범 발탁돼 1천명 훈련
탄탄히 다진 자신감이 성공자산
이민 사업하다 이국생활 도전장
고객 찾아다니며 공격적인 영업
스크린 전광판 업계 거물로 성장
LED 전구는 모두 韓제품 사용해



유씨는 군(軍) 제대 후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던 인쇄업체에 들어갔다. 허드렛일 1년 만에 영업 업무를 맡은 게 계기가 돼 대우전자 사보 제작을 책임지게 됐다. 2년가량 그 일을 하면서 배운 노하우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독립을 결심, ‘코아 그래픽(Core Graphic)’이란 인쇄업체를 차렸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그 해에 결혼도 했다. 이듬해 터진 IMF사태로 다른 인쇄업체들은 줄도산 했지만 그는 되레 많은 돈을 벌었다. 비결은 당시 한국을 탈출하려는 이민 열풍을 사업에 접목했던 것이다. “당시 신문에 이민 알선 광고가 많이 올라오길래 잘되는 줄 알게됐죠. 그래서 이민 알선 회사에 제의해서 인쇄물 제작을 맡았어요.” 대박이었다. 워낙 이민 사업이 잘 되다보니 일감은 넘쳤고 특히 현금으로 대금을 지급받으면서 승승장구했다. 월 수입은 5천만원이 넘었다. 이후 유씨도 자연스레 이민에 관심을 두게 됐고 2000년 관광차 들른 뉴질랜드를 못 잊어 이듬해 이민을 떠났다.

◆무작정 시작한 이민생활

유씨는 뉴질랜드서 5년 정도만 살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야말로 무작정 이민 간 케이스였다. 아내와 2세, 4세짜리 아이 둘을 데리고 갔지만 구체적인 사업 계획이 없었다. 그렇다고 현지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서 설레는 가슴을 안고 비행기를 탔지만 오클랜드 공항에 내려보니 막막했어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이미그레이션(immigration)이 뭔지도 몰랐죠. 불현듯 ‘가족을 어떻게 먹여 살리지’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공항에서 유씨 가족을 마중 나온 한국인들이 있었다. 이민 업무를 대행해주는 브로커, 부동산 업자, 보험사 직원들이었다. 모두들 돈이 목적이었다. 특히 부동산 업자는 유씨 가족을 공항에서 곧바로 큰 저택으로 데려가 집을 보여주면서 “이 집을 사라”고 했다. 유씨는 거절했다. 업자 말대로 그 집을 샀다면 바가지를 썼을 게 뻔했다.

가족이 당장 기거할 곳이 없었다. 이에 유씨는 서둘러서 집을 샀다. 하지만 입주까지는 한달 보름을 기다려야 했다. 어쩔수 없이 하루 120달러짜리 모텔 방에서 한 가족이 생활했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음식은 일주일 만에 동이나 매일 밥을 해먹었다. 반찬이라곤 참치통조림과 고추장뿐이었다. 낯선 이국땅의 방에 갇혀 끼니만 겨우 해결하는, 답답하고도 지루한 나날이었다.

◆“무조건 한다”는 도전정신

모텔 생활을 청산하고 번듯한 집에서 살게되면서 유씨는 돈벌이에 뛰어들었다. 한국에서 생각해둔 광고관련 사업이었다. 사무실을 차리고 영업에 나섰다. 하지만 아무런 인맥과 배경 없이 하는 영업이 쉬울 리가 없었다. 묘안을 짜냈다. 택시 기사를 섭외해 택시를 타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명함을 뿌렸다. 당시엔 고객을 찾아가는 영업방식이 처음이어서 효과가 컸다. 주문이 쇄도했다. 하지만 또 문제가 있었다. 기존 거래처가 없다보니 비싼 값에 하도급을 맡겨야 했다. 일감이 많을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그렇지만 유씨는 우직하게 일을 했다. 시간은 유씨 편이었다. 그렇게 현지 업자들의 신뢰를 쌓아 하도급 단가를 낮췄고 사업도 차츰 자리를 잡아갔다.

이후부터 유씨는 사업을 공격적으로 펼쳤다. 한인회에 나가 인맥을 넓혀 한인가이드북 제작을 맡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인쇄와 디자인 사업은 돈이 안됐다. 반면 간판제작 업체는 많은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고 곧바로 간판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기본 지식도, 경험도 없이 뛰어든 것. “간판 만드는 과정을 눈여겨 지켜봤어요. 그리고 혼자 제작해봤는데 이게 되더라고요. 밤낮으로 공부하고 노력했어요. 물려받은 손재주에다 창의성을 더해 지금은 뉴질랜드 간판업계에서 최고 수준으로 성장했어요.”

유씨는 태국에 본사를 둔 ‘마그마’의 뉴질랜드 법인 회사를 운영하게 되면서 전성기를 열었다. 마그마가 삼성의 밴드 회사였기에 더욱 든든한 배경이 됐다. 덕분에 광고 외에도 쇼핑몰 등의 인테리어 사업에까지 진출했다. 유씨는 호텔 프랜차이즈 회사인 아크그룹(ARCH group)과 쌓은 인연과 신뢰에 힘입어 6성급인 소(SO)호텔 벽면의 LED 전광판 공사를 따냈다. 120만달러짜리 대형 프로젝트였다. 이 역시 처음 해보는 일이기에 시행착오를 여러 번 겪었지만 결국 2년 만에 완벽하게 공사를 끝냈다. 전구는 모두 한국 제품이며, 전구를 받치는 프레임(frame) 역시 유씨가 한국에 가서 직접 제작한 것들이다. 짧게 말해 한국의 찬란한 빛으로 오클랜드의 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는 더 큰 도약을 위해 ‘마그마’와 결별하고 ‘다온’이란 새 회사를 차렸다. 특유의 성실함과 도전정신을 앞세워 뉴질랜드 최대의 LED 스크린 전광판 회사로 키우겠다는 야심을 불태우고 있다.

“난 일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안해본 일도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해요. 그리고 실제로 무슨 일이든 죽기살기로 해보니까 다 되더라고요. 한국인의 자부심을 높일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도전해 성공을 거둘 겁니다.”

글·사진=허석윤기자 hsyoon@yeongnam.com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9-대양주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공동기획: 인문사회연구소, F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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