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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윤 칼럼] 770대 0의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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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19

논설실장
“키신저가 오늘 내게 한반도 핵 문제를 중국에 맡기고 우리는 빠져나오라고 하던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트럼프)

“그건 안 됩니다. 중국에 한반도를 헌상하는 바보짓이에요. 우리가 나오면 한국은 추풍에 낙엽입니다. 북한이나 중국이나 한국 혼자서는 너무 버거워요.”(쿠슈너)

“무엇보다도 일단 유사시에 한국은 군사적으로 절대 도움이 안 된다는 게 문제야. 예전에 주일대사를 지낸 누군가가 내게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횟수가 모두 770번인데 한국이 일본을 침략한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다더군. 이웃한 두 나라가 770대 0이라면 그건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DNA의 문제라고 했어.”(트럼프)

“일본은 한국과 달리 중국을 상대할 힘이 있고 무엇보다 기질이 강해요. 우리가 한반도를 빠져나오면 일본이 엄청난 무장을 합니다. 핵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한국하고는 정신부터가 달라요.”(쿠슈너)

트럼프와 사위 쿠슈너의 대화다. 실제 대화는 아니다. ‘팩트(Fact) 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의 글 속 한 장면이다.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기억 저 편의 책 속 한 구절이 무심코 소환됐다. 소설이지만 미 대통령과 백악관 수석 고문인 사위의 논쟁이 의미심장하다. 최근 일본과의 갈등, 유엔사(UN司)의 전력제공국으로 일본을 포함시키려는 말도 안 되는 시도 등을 생각하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일본의 경제보복은 끝날 기미가 없다. 이낙연 총리는 ‘재난’이라 했지만 이건 포성 없는 전쟁이다. 총칼 들고 국경선을 넘지 않았을 뿐이지 ‘기해경제왜란(己亥經濟倭亂)’이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누란(累卵)의 위기 앞 내부분열은 참으로 허망하다. 일본은 한국 반도체와 삼성만 겨냥한 게 아니다. 한국의 총선과 문재인정부의 교체를 의도하고 있다. 명백한 내정간섭이다. 가해자 프레임에서도 벗어나고 싶어한다. 기술패권으로 한반도를 통제하고 동북아 안보협력 체계의 재편도 꾀하고 있다. 이를 압박으로 굴복시키려는 거다. 그런 일본의 의도에 일부 국내여론이 춤춘다. 필패(必敗)를 예고하는 분열이다.

또 다른 성찰도 필요하다. 2012·2018년 대법원 판결,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사죄발언, 대선후보들의 반일 선명성 경쟁, 위안부 합의 파기, 일본 군함의 입항 거부, 화해치유재단 해산, 초계기 갈등, 국회의장의 일왕 사죄 발언, 한국의 WTO 승소, 징용 피해자 위자료 지급 갈등…. 숨 가쁘게 일본을 몰아붙였다. 조치들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전략과 완급조절이 적절했는지는 곱씹을 만하다. 너도 나도 부추긴 반일구호에 속은 시원했다. 그러나 외교는 실종되고 미래는 내팽개쳐졌다. 대화와 설득이 설 자리는 좁아졌다. 불행했던 과거사는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와 분리하는 게 맞았다. 그러질 못했다. 그러나 화(禍)는 복(福)의 옷을 입고 오고, 복은 화 속에 감춰있다지 않나. 양국 불화가 미래지향적 관계를 위한 새로운 시사점을 던진 것은 역설적이다. 수교 이후 50년 이상 지속해온 ‘1965년 체제’의 한계가 명백히 드러났다. 새로운 관계 설정의 필요성이 부각된 것이다. 이런 성찰에서 한일갈등을 마주하면 해법도 보인다. 갈등의 단초가 된 징용피해 보상안부터 새로 접근해야 한다.

‘0의 DNA’가 갖는 뜻은 다의적(多義的)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란 오랜 자부심의 발로로 해석할 수 있다. 지정학적으로 일본을 공격할 이유가 없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다. 그러나 수많은 왜침에도 불구하고 국력을 키워 유비무환(有備無患)하지 못했다는 것이 보다 솔직하다. 외세에 만만하게 보인 것은 자초한 잘못이다. 그때마다 극심했던 내부분열과 지도층의 무능은 뼈아프다. 그러나 한 번도 제대로 징비(懲毖)하지 못했다. ‘0의 DNA’ 속에는 그런 참회(懺悔)가 녹아있다. 우리는 오랜 고난과 피, 땀의 결정(結晶)으로 세계 10대 강국을 이뤘다. ‘0의 DNA’는 더 이상 우리에게 맞지 않는 옷이다. 보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DNA로 진화해야 한다. 100년이 걸린다 한들 어찌 참고 준비하지 못하겠는가.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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