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 레저·관광 명소, 어디까지 가봤니? .11] 조선 성리학의 산실 도동서원

  • 박종진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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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24   |  발행일 2019-07-24 제13면   |  수정 2019-07-24
세월은 흘러도 한훤당의 선비정신 살아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달성 레저·관광 명소, 어디까지 가봤니? .11] 조선 성리학의 산실 도동서원
도동서원 중정당과 사당 등은 당시 서원과 사묘건축을 대표할 만큼 뛰어나 1963년 보물 제350호로 지정됐다. 서원을 둘러싼 담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 전국 토담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됐다.
[달성 레저·관광 명소, 어디까지 가봤니? .11] 조선 성리학의 산실 도동서원
한훤당의 외증손 한강 정구가 도동서원 중건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것으로 알려진 은행나무. 남인 예학의 대가인 한강은 학문적으로 대선배이자 외증조부이기도 한 한훤당을 제향하는 서원 건립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대구 달성에는 선조들의 얼과 유산이 담긴 의미있는 장소가 산재해 있다. 그 가운데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엿볼 수 있는 서원은 빼놓을 수 없는 명소 중 하나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각 서원에는 인격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학문에 매진하던 선비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현재 달성에는 10곳의 서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왕으로부터 편액을 하사받은 ‘사액서원’만 3곳에 달한다.

특히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도학과 덕행을 숭앙하기 위해 세운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소수서원 등과 함께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그 역사적 가치를 세계가 인정한 셈이다. ‘달성 레저관광 명소 어디까지 가봤니’ 11편은 조선 성리학의 산실 ‘도동서원’에 대해 다룬다.

정유재란때 불탄 쌍계서원이 효시
이전후 1607년 도동서원으로 사액
사당엔 한훤당·한강 선생 위패 모셔
수월루·환주문·중정당 등 일렬 배치
조선중기 서원건축의 정형 보여줘
강학공간 중정당은 극도의 절제미

[달성 레저·관광 명소, 어디까지 가봤니? .11] 조선 성리학의 산실 도동서원
한훤당과 외증손 한강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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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내부 좌우 벽면에는 한훤당의 시 ‘선상’과 ‘노방송’을 형상화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달성 레저·관광 명소, 어디까지 가봤니? .11] 조선 성리학의 산실 도동서원
선조 임금이 경상도 도사 배대유의 글씨를 받아 내린 도동서원 현판.
[달성 레저·관광 명소, 어디까지 가봤니? .11] 조선 성리학의 산실 도동서원
문루인 수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유생들의 휴식처나 강독 공간으로 사용됐다.


#1. 공자의 도가 깃든 서원

달성 현풍읍에서 낙동강을 오른편에 끼고 한적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고갯길을 만난다. 이내 U자로 굽은 여수골이 나타나고, 오르막의 끝에 다다른다. 해발 250m, 다람재다. 좋은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정자가 빠질리 만무하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면 한 폭의 동양화가 따로없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고령 개진면 들의 모습이 평온하다.

강쪽으로 향한 시선을 왼쪽 발 아래로 떨구면 오래된 기와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진등산 북쪽 기슭에 터 잡고 있는 도동서원이다. 지체없이 서원으로 향한다.

주차장에 이르자 수령 400년 된 은행나무가 먼저 반긴다. 그 풍채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이 나무는 한훤당의 외증손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서원 중건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도동서원은 원래 쌍계서원(雙溪書院)으로 불렸다. 1568년 현풍 비슬산 기슭 쌍계동에 터를 잡고 서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1573년에는 같은 이름으로 사액됐다. 하지만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됐고,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재건 당시엔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으로 불리다 1607년 ‘도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도동(道東)’은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사액 이후 서원이 있던 마을 이름도 도동으로 바뀐다. 서원과 마을 이름의 유래가 뒤바뀐 셈이다. 서원으로 향하기 전 시설 왼편에 위치한 신도비각에 들른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 벼슬을 한 인물의 묘 근처에 세우는 비석이다. 한훤당의 신도비는 특이하다. 비신을 받치는 거북이 둘이다. 이른바 ‘쌍귀부’다. 조선시대 신도비 중 쌍귀부를 쓴 곳은 도동서원이 유일하다고 한다. 희귀성에 따른 보존가치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로 지정이 안돼 있다.

#2. 조선시대 서원 건축의 정수

서원을 찬찬히 둘러본다. 앞으로는 낙동강, 뒤쪽엔 진등산.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에 둥지를 틀었다. 주요 건물은 중심축을 따라 경사면에 반듯하게 자리잡았다. 수월루(水月樓)와 환주문(喚主門), 중정당(中正堂), 내삼문, 사당이 일렬로 위치한다. 안내를 맡은 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는 조선 중기 이후 서원 건축의 정형을 보여준다고 귀띔했다.

서원 정문인 환주문은 맞담에 세워져 있다. 성인이 드나들기엔 크기가 작다. 갓 쓴 유생이라면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들어설 수밖에 없었을 터. 입구에서부터 예를 갖추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환주문을 지나 서원의 중심이자 강학 공간인 중정당을 만난다. 극도로 절제된 미를 느낄 수 있다. ‘중정(中正)’은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는 중용(中庸)의 상태를 뜻한다. 도동서원의 교육 철학이자 교훈이다. 중정당에는 서원 편액이 안쪽 벽면과 앞 처마 두 곳에 걸려 있다. 벽면 편액은 선조 임금이 내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강이 스승 퇴계의 글씨를 집자했다고 한다.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다. 특히 전면에 굵은 민흘림기둥 여섯 개가 눈길을 끈다. 크기도 큰데다 기둥 윗부분에 둘려진 흰 종이 때문이다. 이른바 ‘상지(上紙)’다. 국내 서원 가운데 상지를 두른 곳은 도동서원이 유일하다. 도동서원 유사들에 따르면 상지의 역할은 이곳이 경의를 표해야 할 곳임을 알게하는 표식이다. 서원 아래 낙동강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도 상지를 보면 예를 갖췄다고 한다. 도동서원에 ‘하마비(下馬碑·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하는 곳을 표시한 비석)’가 없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도동서원의 미(美)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곳이 있다. 바로 중정당 기단이다. 모양과 재질이 서로 다른 돌들이 4각형, 6각형, 8각형 등의 모양으로 다듬어져 빈틈없이 맞물려 있다. 색상도 옥빛, 흙빛, 분홍빛, 회색빛 등 제각각이다. 마치 조각보를 펼쳐놓은 듯하다. 날씨와 계절에 따라 색이 오묘하게 변하는 것이 특징이다.

기단 중간중간 머리를 내밀고 있는 네마리 용도 눈여겨 볼 만하다. 유독 왼쪽 두번째 용만 모습이 조금 다른데 이유가 있다. 네마리 모두 도난을 당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되찾은 뒤 한 마리만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세마리는 모조품이다. 나머지 진품은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기단을 자세히 보면 오른편 계단 옆엔 위쪽을, 왼쪽 계단 옆엔 아래쪽을 향하고 있는 동물(다람쥐)을 볼 수 있다. 이는 ‘동입서출’ 들어가고 나오는 방향을 알려주는 표식이다.

#3. 동입동출(東入東出)

중정당에 걸터 앉아 정면을 응시한다. 낙동강의 풍광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수월루에 가린다. 공부에만 전념하라는 배려일까. 하지만 수월루는 서원 중건 당시엔 없던 건물이다. 후대에 와서 ‘주문이 없어 격이 떨어져 보인다’는 의견이 많아 1849년 세워졌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유생들의 휴식처나 강독 공간으로 사용됐다. 1888년 화재로 소실됐다가 1973년에 중건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중정당 좌우엔 거인재(居仁齋)와 거의재(居義齋)가 마주보고 있다. 서열이 높은 유생들은 동재(거인재)에, 그보다 어린 유생들은 서재(거의재)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두 건물을 자세히 보면 비슷하지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둥근 기둥과 사각 기둥, 창의 유무 등을 볼 때 거주인의 지위차가 있었음을 미뤄 짐작하게 한다.

중정당을 뒤로한 채 내삼문으로 향하자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진다. 사당으로 향하는 세 개의 문 중 서문쪽 계단이 없다. 보통 귀신이 출입하는 중앙문(귀문)을 제외하고, 동문으로 들어간 뒤 서문으로 나오지만 이곳에선 동문을 출입구로 이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동쪽을 유독 중요시하는 도동서원만의 정체성이다. 사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한훤당의 위패가 모셔있다. 오른쪽에는 서원 건립을 주도한 한강의 위패도 배향돼 있다. 위치상 배향이 아닌 종향에 가깝지만 배향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한다. 한훤당 위패 아래에는 기제사에 쓰이는 모사그릇이 있는 점도 색다르다. 다른 사당에선 볼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다. 또 하나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망례위는 일반적으로 석물로 지상에 조성되는데, 도동서원의 경우 사당 서편 담에 작은 구멍처럼 생긴 감(坎)이 따로 마련돼 있다.

사당 내부 좌우 벽면에는 세월을 거스른 듯한 벽화가 자리잡고 있다. 색이 선명하다. 한훤당의 시 ‘선상(船上)’과 ‘노방송(路傍松)’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이 벽화들은 사원 중건 당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그림을 그린 이가 누군지 알려진 바는 없다.

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대구의 뿌리 달성, 달성을 누리다, 달성에 살다. 한국 미의 재발견, 궁궐·유교건축, 이상해.

[달성 레저·관광 명소, 어디까지 가봤니? .11] 조선 성리학의 산실 도동서원
도동서원 왼쪽편에 자리잡은 한훤당의 신도비는 두마리의 거북이 비석을 받치는 ‘쌍귀부’로 희귀성을 갖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다.

▼ ‘소학동자’ 김굉필

어려서 호탕하고 거리낌 없던 김굉필은 성장하면서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된다. 서울과 가까운 성남(城南)·미원(迷原·경기도 양근의 옛 지명)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주로 영남 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처가), 성주의 가천(伽川·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당시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小學)’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칭했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해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다.

1480년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한 뒤 1496년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일파로 지목돼 평안도 희천에 유배됐다. 후에 전라도 순천에 이배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명예를 회복했다.

김굉필은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썼다. 특히 당시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했다. 사림파의 개혁 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 구축과 인재 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돼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됐다. 기묘사화로 김굉필의 문인들이 화를 입게 됐음에도 1610년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됐다.
공동기획지원=달성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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