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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 성지 상주 .6] 상주의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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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종진기자 박관영기자
  • 2019-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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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3일 상주장날, 500여명이 日帝 탄압에 의연히 맞서 “대한독립 만세”

3·1운동 당시 상주읍성 남문이 있던 상주 중앙시장 일대. 상주의 첫 독립 만세운동은 3월23일 상주 장터에서 벌어졌다. 경성 중동학교 학생 한암회가 먼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있던 군중들도 이에 감격해 독립만세를 연호했다고 한다.
상주지역 항일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고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남산공원에 조성된 항일독립의거 기념탑.
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안주·의주 등지에서 시작된 독립만세 운동은 들불처럼 전국 각지로 번졌다. 지역별 주요 거점도시를 거쳐 시·군, 읍·면·리 단위로까지 퍼져 나갔다. 나라가 큰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하던 상주에도 어김없이 만세 물결이 출렁였다. 경북도가 발간한 ‘경북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상주의 만세운동은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총 5차례에 걸쳐 이어졌다. 당시 사회 지도층은 물론 학생과 민초들이 분연히 일어나 일제에 맞서 싸웠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상주 출신 인사만 16명에 달한다. ‘호국의 성지 상주’ 6편은 1919년 봄 뜨거웠던 상주의 3·1운동에 대해 다룬다.

#1 3·1 운동의 태동을 함께

3·1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프랑스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세계 각국 대표에게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온 겨레가 독립을 염원한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나타낼 필요가 있었고, 이를 실현한 것이 독립만세 운동이다.

3·1운동의 주축은 종교계와 학생들이었다. 일제가 독립운동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정치성을 띤 모든 조직을 강제 해산시켰기 때문이다.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꾀하던 각 종교계와 학생들은 1919년 2월 들어 대통합 분위기가 형성된다. 2월8일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것이 기폭제가 됐다. 불교계도 가담하기로 하면서 천도교·기독교, 학생들의 대연합이 구성됐고 전 민족적 독립운동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1919년 3월하순 이후 5차례 만세운동
상주 출신 16명 독립유공자 서훈받아
첫 거사 한암회·강용석·성필환 등 주도
부친상 당한 성해식은 상복 입고 연설
日 헌병 총칼 아랑곳않고 완강히 저항
4월8일 문장산 시위땐 헌병과 투석전


항일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3·1운동은 광무황제의 장례일(3월3일)에 맞춰 기획됐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만큼 그 파장이 더욱 클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3월1일 민족대표들은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파고다공원에 운집해 있던 학생과 시민들도 독자적인 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운동에 들어갔다.

이날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들 중에는 상주 출신 인사도 상당수 포함됐다. 당시 선린상업학교 학생이던 박인옥, 조선약학교 학생 박희창, 열혈농민 허룡 등이 대표적이다. 기록에 따르면 박인옥은 독립선언서 100매를 마포 방면의 민가와 행인에게 배부했고, 박희창은 행렬의 선두에 서 보신각과 남대문 등지로 행진하면서 시위를 선도했다. 허룡도 박인옥 등과 함께 행진하며 만세운동에 가세했다.

당시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는 ‘허룡, 박인옥, 박희봉(박희창) 등은 전시한 목적 하에 파고다공원 또는 동 공원에서 진출한 그 군중에 참가해 함께 대한독립 만세·조선독립만세 또는 독립 만세를 절규해 군중과 창화했으며, 독립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여 인심을 격분케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한 자’라고 기록돼 있다.

이들 외에 상주 출신이자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新民會)’ 소속인 김진호 선생도 역사의 순간을 함께했다. 신민회에서 경상도 대표로 활동하기도 한 그는 이날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필주 목사의 위촉을 받아 서울에 있는 각국 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그가 몇몇 학생에게 독립선언서를 중국대사관, 러시아영사관 등에 전달하도록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2 만세물결, 상주읍 장터를 뒤덮다

상주읍성 남문 인근에 위치한 상주 옥터. 일제에 맞서 항일운동을 펼친 상주지역 인사들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상주 중앙시장 내 옛 상주읍성 남문이 있었던 자리를 표시한 표지석.
3·1운동의 물결은 상주로 이어졌다. 초기 상주 만세 운동을 주도한 것은 학생들이었다. 지역 보통학교 학생과 서울에서 유학하다 귀향한 학생들이 3월 중순부터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거사를 준비했다. 상주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강용석·성필환, 경성 중동학교 학생 한암회, 보통학교 학생 조월연, 경성 국어보급학관 학생 석성기 등이 중심이 됐다. 밀의(密議)가 거듭되고, 만세운동날이 정해졌다. 3월23일. 상주장날이었다. 당시 상주 오일장은 하루 거래액이 2천500원에 달하는 큰 장이었고, 평소에도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고 전해진다.

당일 오후 5시30분쯤, 장이 파할 무렵 갑자기 장터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태극기를 든 한암회가 시장 한복판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높여 외쳤기 때문이다. 장터에 있던 군중도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했다. 큰 목소리로 장이 떠나갈 듯 ‘독립 만세’를 목놓아 외쳤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경계를 서던 일본 헌병이 황급히 달려들어 한암회를 붙잡아 갔고, 그가 끌려가는 모습을 본 군중은 크게 동요했다. 하지만 누구하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소강상태에 있던 시위는 30분만에 다시 뜨겁게 달아오른다. 부친상을 당한 성해식이 상복을 입은 채 시장 입구에 있던 누문의 계단에 올라 만세운동을 독려하는 연설을 한 것이다. 당시 성해식은 장터에 모인 500여명의 군중을 향해 “비록 나는 미천한 사람이지만 이번에 조선이 독립된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분과 같이 만세를 부르고자 하니 다 같이 만세를 부르자”고 소리친 뒤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했다. 감정이 고조돼 있던 군중은 감격해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특히 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생 100여명은 적극적으로 가세해 독립을 향한 염원을 마음껏 분출했다.

시위에 불을 붙인 성해식도 일본 헌병들에게 끌려가고야 만다. 연행 당시 심한 폭행을 당해 상복과 방립이 찢긴채 그의 몸에선 유혈 낭자했다고 한다. 만세운동이 확산되자 일본 군경은 총검으로 시위를 해산시키려 했으나 군중들은 완강하게 버텼다. 매일신보는 이날 상주장터 만세운동의 열기는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사그라졌다고 기록한다.

전날의 감동이 채 가시기 전, 두번째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이튿날 석성기와 강용석 등의 주도로 또 한번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석성기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다시 만세의 횃불을 들자”고 제안했고, 학생들은 이를 흔쾌히 승낙하고 행동으로 옮겼다.

상주읍사무소에 남아있는 수형자 명부에 따르면 한암회는 징역 1년6월, 강용석 징역 1년2월, 성해식·박인옥·강보석·성필환·조월연·송인수 징역 8월, 그외 인사들은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겪었다.

#3 마을 주민 주도의 만세 운동

이후 상주의 만세운동은 학생이 아닌, 마을 주민이 이끌게 된다. 시위 장소 역시 마을 인근으로 소규모 단위로 진행됐다. 지역 학생들의 들끓는 열정이 도화선이 돼 주민들도 각성하게 된 셈이다. 주도적인 세력이 없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세 번째 만세운동은 3월29일 이안면(利安面) 소암리(小岩里) 일대에서 벌어졌다. 첫 시위가 일어난 지 6일만이다. 동성마을인 소암리의 채씨 일족 청년 20여명은 이날 밤 10시쯤 마을 남쪽 제방 위에서 독립만세를 함께 외쳤다. 이들의 독립운동은 일본 경찰에게 알려졌고 채세현, 채순만 등 주요 인사가 검거돼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현재 소암리에는 이들의 저항 정신을 기리는 만세동산이 조성돼 있다.

상주의 만세운동은 4월 들어서도 지속됐다. 이안면에 이어 화북면 마을 지도층도 가세하기로 뜻을 모으고 문장산(文藏山)과 운흥리(雲興里)에서 두차례에 걸쳐 만세운동을 펼쳤다. 당시 화북면 장암동(壯岩洞) 구장인 이성범은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놓고 “조국을 다시 찾는 일은 우리 청년들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단결해 왜놈들을 우리 땅에서 몰아내자”고 독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장산 만세운동은 저항의 역사이기도 하다. 4월8일 마을주민 100여명이 문장산에 올라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 20여명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했다. 이에 주민들은 투석전을 벌이면서 끝까지 항거했다. 안타깝게도 문장산 만세운동은 판결문 등의 자료가 남아있지 않고, 수형자 명부도 6·25 전쟁 때 소실됐다고 한다. 대신 화북면사무소에서 ‘독립유공자조사기’를 만들어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성범·김재갑·홍종흠·이용회 4명의 기록을 남겼다.

이튿날 화북면 운흥리에서 또 한번 독립만세의 외침이 울려펴졌다. 마을 지도층인 전성희와 정양수 등의 주도로 모인 100여명의 마을 주민은 그 자리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목놓아 불렀다. 하지만 화서면 신봉리(新鳳里)에서 거행하기로 한 만세운동은 아쉽게 무위로 끝났다.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하던 이면우, 강병찬 등이 4월13일 거사를 치르기로 하고 사전 준비를 했으나 기밀이 누설되는 바람에 무산됐다.

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경북독립운동사 Ⅲ, 안동대 안동문화연구소. 상주의 항일독립운동, 상주문화원.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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