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그 중심에 선 대구·경북인 .12] 한계 이승희의 독립운동 <하> 中 한흥동 머물며 향약 실천하려 노력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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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07   |  발행일 2019-08-07 제13면   |  수정 2019-08-07
“병농일치 통해 독립운동기지 마련” 中 동북3성 황무지 개간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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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이승희와 선친 한주 이진상의 생가(성주 한개마을).

中 한흥동 머물며 향약 실천하려 노력
한민학교 설립 이주한인 자녀 교육도
동포 실업 장려 권업회 창설에도 동참
중국 총통에 삼강오륜 바탕 통치 권장

서간도로 가 유생들 규합 ‘공교회운동’
공자 본향 찾아가 ‘공맹의 도’ 고민도
동북3성 개간 독립운동기지 마련 결심
매입한 땅 알고보니 습지…실현 못해

영조에 직언한 돈재 이석문 5대조로 둬
제자 심산 김창숙·김정묵 등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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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재 이석문의 북비(성주 한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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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이승희가 중국 총통 위안스카이에게 보낸 편지 ‘여원총통세개’(한계 선생 문집).


◆한흥동에서의 활동

이승희는 고향 성산에서 실천했던 향약을 중국 헤이룽장성 밀산부 한흥동에서 시도했다.

그는 ‘동국사략’을 지어 민족의 역사를 가르치는 한편 민약(民約)을 만들었다. 민약은 향약과 유사하다. 또 한민학교를 세워 이주한인의 자녀를 가르쳤다. 이밖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독립군의 병제와 민족교육의 방향을 제시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반을 닦았다.

그는 1909년 동짓날을 맞아 ‘일칙명(日則銘)’ ‘일송오강(日誦五綱)’ ‘오강십목(五綱十目)’을 짓고 마을 사람들에게 매일 암송하도록 했다. 삼강오륜의 일종이다. 오강은 ‘천지를 위해 마음을 바로 하고(爲天地立心), 부모에게 몸을 바로 하고(爲父母立身), 나의 생을 위해 도를 바로 하고(爲吾生立道), 백성을 위해 표준을 바로 세우고(爲斯民立極), 만세를 위해 모범을 바로 세운다(爲萬世立範)’는 의미다. 십목은 각각의 강(綱)에 10가지 세목을 붙여 생활 지침으로 삼았다. 즉 생활 속에서 유교 이념을 실천하게 한 것이다.

1910년 그는 북만주에서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한없이 통곡하며 “국사가 끝났으니 내가 떠돌아다니다가 타국에서 죽어 독수리밥이 되겠구나. 광복이 되기 전에는 결코 귀국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승희는 1911년 12월19일 이상설과 함께 동포사회의 실업을 장려하고 노동을 소개하며 교육을 보급하는 취지로 만든 ‘권업회’ 창설에도 동참했다. 이듬해엔 중국 총통 위안스카이에게 편지를 보내 “서양의 정치제도는 서양에 맞는 것으로 중화를 멸망시키게 된다. 중국은 삼강오륜에 의거해 큰 도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며 “신해혁명 이후 수립된 중화민국의 공화제 대신 입헌군주제를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

쑨원에게도 편지를 보내 “서양이 선교와 무역을 통해 다른 나라를 노예로 삼고 인종을 멸하고 있다”고 하면서 “중화의 가르침을 진작시켜 광복의 공을 성취하기를 바란다”며 응원했다.

이승희는 한흥동에 거주하면서 동포사회가 지역색에 따라 갈라지고 분열되면서 어려움에 처하자 낙담했다. 결국 그는 1913년 7월 대종교 인사들에게 경영권을 맡기고 서간도로 이주했다. 그가 이주한 뒤 이곳에 온 대표적인 인물은 홍범도다. 홍범도는 이상설과 이승희의 지지하에 한흥동에 밀산무관학교를 세우는 한편 둔전병을 조직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곳의 독립군은 3·1운동 후 대한독립군의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 참전해 큰 전과를 올렸다.

◆서간도 안동현(현 단둥) 접리수촌으로 이주

이승희가 헤이룽장성 동북지역에서 수천리 떨어진 랴오닝성으로 거처를 옮긴 이유는 부친의 가르침 아래 동문수학했던 회영 장석영이 “한인이 정착해 살기에 북간도보다 서간도가 더 적합하다”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실제 북간도 지역은 서간도보다 지세가 험하고 추위도 훨씬 매섭다.

1914년 1월 안동현(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흥륭가에 도착한 그는 경술국치 후 조국으로부터 망명해 이곳에 정착해 있던 영남과 기호출신 유생들과 만나 교류했다. 그는 6개월간 접리수촌에 머무르며 이곳의 유생들을 규합해 ‘동삼성한인공교회(東三省韓人孔敎會)’라는 취지서를 발표했다. 이 취지서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삼강오륜을 지키며 교민이 단결해 후진을 양성하자는 내용이다. 그는 공교회운동을 더 적극적으로 펼치려는 목적으로 베이징으로 가 강연과 집필에 힘썼다. 한편으로 교민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재만 한인의 중국입적과 민단공교회 설립은 좌절됐다. 연속된 실패로 실의에 빠진 그는 차남 기인과 함께 공자의 본향인 산둥성 취푸로 가 3개월간 공자묘 등지를 둘러보고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는 중국에 직접 가서 진정한 ‘공맹의 도’가 무엇인지 찾으려 애썼다.

그는 1914년 6월까지 베이징에서 머물며 동북3성의 황무지 개간에 한인의 참여와 역할을 강조하며 ‘동삼성시무사의(東三省時務私議)’를 써 자치와 교육, 병농 일치를 통해 궁극적으로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고자 했다.

◆마지막 정착지인 선양 서탑으로

이승희는 그해 6월22일 다시 랴오닝성 봉천(선양) 서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 개간할 황무지가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 이미 망명해 있던 이계동(일명 이봉희·석주 이상룡의 동생), 김창현(고령), 성종호(창녕), 권병하(서울) 등과 교류하며 공교회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는 한편 요중현 덕흥보(현 랴오닝성 선양시 양사강진 덕흥보촌)의 황무지를 개간해 한인 집단거주지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는 100여 호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토지 280일경(日耕·소 한 마리로 하루에 갈 수 있는 면적)을 매입하기로 했다. 국내에 있는 장남 기원에게 편지를 써 “선조를 모실 전답을 제외하고 나머지 팔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팔아서 보내라”고 기별했다. 그는 선불을 주고 토지를 매입했으나 이 또한 패착이 돼버렸다. 그 땅은 여름이 되면 해동이 돼 물바다가 되는 습지였다. 이승희는 대단히 낙담했다.

그는 한계유고에 ‘여생은 얼마 남지 않았고, 세상의 일은 기다릴 수 없다. 다행인 것은 동지를 얻은 것뿐’이라고 회한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머물던 여관에 도둑이 들어 황무지를 매입하고 난 돈과 각계로부터 받은 영농자금을 다 훔쳐갔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이 소식이 성주에 전해지자 고령 등지에선 ‘덕흥보계’가 꾸려져 그에게 자금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 집단농장을 만들어 독립군기지를 건설하려던 마지막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덕흥보의 일을 차남 기인에게 맡기고 봉천 서탑 ‘일승잔(日升棧)’이란 객잔에 머물며 공교회운동에 전념했다. 한때 몇몇 소작인을 데리고 취푸 인근에 가서 농사를 지으려는 꿈도 꿨지만 이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1916년 3월30일 70세의 일기로 망국의 한을 간직한 채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62세에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해 8년간 풍찬노숙하며 조국독립과 공교회운동을 통해 유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꿈이 좌절된 것이다.

이승희는 서거하기 이틀 전 권병하에게 “나는 천하의 일을 마음에 품고 그대들과 함께 해보고자 했는데 이제 끝난 것 같네”하며 유언을 남겼다. 이전에 “나는 나라가 광복이 되어야 돌아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나의 시신을 모셔갈 수는 있겠지만 나의 혼은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했다. 그의 시신은 고국 성주로 돌아와 5월29일 유림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애도를 표한 이가 1만여 명이고 만사가 1천087통, 제문이 167통이나 됐다고 한다.

1922년 성주 선남면 소학동 송래산으로 이장했으며,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훈했다.

◆이승희의 가계와 후학

이승희(1847~1916)는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옛 대포리) 일명 한개마을에서 한주 이진상과 흥양이씨 사이에서 1남5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성산이다. 고려 개국공신 이능일을 시조로 하고 세종 때 진주목사를 한 이우가 입향조다. 그의 5대조는 소설 ‘북비(北扉)’의 주인공인 돈재 이석문이다. 이석문은 영조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을 지냈다.

이후 이석문은 사도세자의 호의무관이 돼 최측근에서 세자를 보필했다. 후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위험에 처하자 영조에게 목숨을 걸고 부당한 징벌이라며 직간하며 맞서다 관직이 박탈돼 성주 한개마을로 낙향한 인물이다.

그는 노론 인사들이 집 앞을 지나면서 빈정대자 “시류에 아첨하는 무리와는 접하기 싫다”며 남쪽 사립문을 뜯어 북쪽으로 옮기고, 아침마다 그 문을 향해 절을 하면서 임에 대한 충절과 사무침을 달랬다고 한다. 이 문이 ‘북비(北扉)’이며 그를 ‘북비공(北扉公)’, 집을 ‘북비고택’이라 부른다.

이석문의 손자 이규진이 정조 말년에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자 정조가 “너희 집에 지금도 북비(북쪽으로 낸 대문)가 있느냐”고 하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정조 사후 이규진은 황해도 은률현감으로 벼슬을 마감했다.

이승희의 종조부는 응와 이원조다. 응와는 18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헌종 때 정언을 거쳐 철종 때 경주부윤을 했다. 재직 중 경상좌도 암행어사 김세호의 탄핵으로 삭직됐으나, 재기용되어 대사헌을 거쳐 한성판윤, 공조판서를 했다.

김세호는 경상도관찰사 재직 시 대구읍성을 중수한 인물이다. 이승희의 부친은 한주 이진상으로 이원조의 동생인 이원호의 아들이다. 이승희의 종조부 이원조와 한주 이진상으로 인해 한개마을 성산이씨는 영남 ‘주리세가(主理世家)’의 명망을 얻게 된다. 이승희는 응와와 한주의 학풍을 계승해 공자의 유교 이념에 근거한 동양의 새로운 정치이론과 세계상을 구상했고 유교를 통해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성취하고자 혼신의 힘을 다 바친 독립운동가였다.

이승희의 제자는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김정묵 등이며, 이두훈의 제자는 임시정부 법무차장을 역임한 남형우(고령)와 역시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후 반민특위위원장을 역임한 제헌의원 김상덕이다.

글·사진=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 참고문헌: 한계 이승희의 생애와 독립운동(권대웅 성주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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