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청주여중생과 목동빗물펌프장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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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07 08:06  |  수정 2020-09-09 14:38  |  발행일 2019-08-07 제23면
[문화산책] 청주여중생과 목동빗물펌프장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지난달 23일 산 속에서 실종됐던 청주 여중생이 실종 열흘 만인 지난 2일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유사한 사례 중 극히 드문 해피엔딩이다. 한편 지난달 31일 폭우로 서울 양천구 목동 빗물펌프장 공사장 지하 수로에서 현장 작업자 3명이 빗물에 휩쓸려 실종된 후 모두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뉴스를 장식한 사건이지만 결말의 대비는 극명했다.

여중생은 또래에 비해 건강한 편이었고, 장마철이라 수분섭취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등 호조건이 적지 않았다. 연인원 5천700여명이 투입된 수색작업과 물량을 아끼지 않은 장비 지원도 구조성공이라는 성과로 드러났다. 많은 이들이 소녀의 생환에 감동과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역설적으로 이런 유형의 사건사고가 대부분 비극으로 귀결되는 쓰라린 경험 와중에 정말 희귀한 긍정의 결말 때문은 아닐까.

목동 빗물펌프장 사고는 딱 반대 지점에 있다. 우리 사회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겪어온, 최소한 막지는 못해도 피해는 줄일 수 있었음에도 배금주의와 무사안일의 결합으로 귀한 생명을 잃었다. 사고 이후 조사와 처리 과정은 오히려 사고 자체보다 더 보는 이들을 허탈하게 만든다. 폭우로 수문을 급히 개방했음에도 작업자들에겐 카카오톡 하나 달랑 보내고 알아서 탈출하겠지 하는 무사안일과 생명보다 고가 장비 간수가 우선인 끔찍한 인명경시, 희생자 3명 중 2명은 하도급업체 직원, 1명은 그들을 구해보려던 원도급업체 소속이라는 것은 뿌리 깊은 비정규직 문제의 그림자를 저주처럼 덧씌운다. 만약 작업자가 원도급업체 직원, 즉 ‘동료’였다면 과연 무자비하게 유일한 탈출구를 닫았을까.

가스 누출사고에서 두 주인공이 탈출하는 내용의 한국영화 ‘엑시트’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백수 신세인 남자주인공과 사장 아들 점장에게 시달리는 부점장인 여자주인공이 대학 동아리 시절 갈고닦은 클라이밍 실력으로 유독가스가 차오르는 재난 상황을 헤쳐나가는 내용이다. 코믹 액션을 표방하지만 주인공 캐릭터 설정만으로도 관객들에게 현실과 연관해 다양하게 생각할 소재를 던진다.

재난영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극단적 상황과 정상적 시스템의 부재를 전제한다. 그래야 관객들이 영화 볼 재미가 생긴다. 하지만 외국의 동종영화들에 비해 우리 영화들은 무능력한 시스템과 도움은커녕 해가 되는 권력만 가득하고 그저 가족만이 의지할 대상으로 그려지는 경향이 강하다. 영화는 의도하건 의도치 않건 우리가 겪어온 역사와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 동명의 사건을 영화화한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이나 2010년 칠레 광부 매몰사건을 다룬 ‘33’ 같은 감동과 훈훈함을 갖춘 재난영화를 갖게 될까.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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