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아베의 사무라이 근성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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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07   |  발행일 2019-08-07 제31면   |  수정 2020-09-08
[영남시론] 아베의 사무라이 근성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국민들로부터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어낸 계몽사상가로 추앙받는 인물로 만엔짜리 지폐의 도안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이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과 대등한 국가가 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 중에 하나로 사무라이 문화의 청산을 꼽은 바 있다. 그가 본 사무라이 문화는 개인의 권리와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럽의 기사도 정신과 달리 접촉하는 물건에 따라 수축과 팽창을 오락가락하는 고무처럼 위를 향해서는 수축하고 아래를 향해서는 팽창(偏縮偏張)하는 성격이 있다고 했다. 이런 ‘비열한 행위를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는’ 사무라이 문화의 가장 큰 피해자는 무고한 백성이라고 혹독한 비판을 한다.

언뜻 보면 개인주의와 함께 보편적 인권과 평등을 강조함으로써 근대시민사회의 이념에 충실한 것 같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본을 유럽과 견주었을 때만 써먹는 논리였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시선이 아시아로 향하게 되면 내면에 숨어있던 약자에 대한 멸시·차별·혐오·적대감은 무한팽창한다. 그의 시선에 비친 조선국민은 ‘연약하고 염치도 없고’, 조선의 상류사회는 ‘썩은 유학자들의 소굴’이고, 하류는 ‘노예들의 군집’이어서 일본이 ‘손 한번 들고 발 한번 옮기면’ 곧바로 무너질, ‘나라도 아닌 나라’라고 했다. 동학농민전쟁 때는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한반도 출병을 선동하기도 했고, 그 뒤로는 정한론을 설파하며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리고 중국은 ‘노후의 극에 달한 노대국’일 뿐이며, 중국인과 중국병사들을 ‘거지’나 ‘거지들의 행렬’이라고 멸시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이런 비열한 사무라이 근성은 그만의 독특한 사고체계가 아니다. 일본의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나스메 소세키는 영국에 가서는 영국의 시민뿐 아니라 개마저도 품위가 넘친다고 굴욕적인 찬사를 늘어놓더니, 한반도와 만주를 여행하고 난 뒤 조선, 그리고 만주사람에게는 온갖 경멸과 멸시, 혐오의 표현으로 지면을 가득 채운다.(‘만한 이곳저곳’)

메이지 유신으로 사무라이의 상징과도 같던 ‘다이토(帶刀)’가 금지됨으로써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는 종적을 감춘다. 하지만 일본의 권력층, 지식인들의 내면세계에서 ‘편축편장’이라는 사무라이의 비열한 근성까지 청산되었을까.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는 지난해 “G7 국가 중 우리들은 유일한 유색인종이다”라는 막말(?)을 자랑삼아 떠벌리다가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유럽과 백인 앞에서는 비굴하게 수축하고 아시아에 와서는 오만하게 팽창하는, 그러면서도 수치를 모르는 사무라이 근성의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들의 뿌리마저 부정하고 폄훼하는 일본 권력층의 사무라이 근성은 한 세기 전에 ‘탈아입구’ ‘팔굉일우’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패권국이 되고자 했던 그들의 집단 망상이 제대로 치유되지 못한 탓이다.

아베 총리가 한국을 상대로 획책하고 있는 경제 전쟁은 ‘편축편장’이라는 사무라이 문화의 전형적인 속성을 빼닮았다. 미국과 유럽에 대해서는 한없이 공손하면서도, 만만한 상대인 한국에 대해서는 지배력을 무한 팽창하려는 의도가 빤히 보인다. 차관급의 관료가 공개된 자리에서 일국의 대통령을 향해 무례하다는 폭언을 당당하게 내뱉을 수 있는 배짱은 믿는 구석이 있는 비열한 사무라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만용이요 객기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일 간의 분쟁은 전쟁책임과 전후문제를 청산하지 못했던 일본의 정치적 후진성에 그 뿌리가 있다. 또 그 한편에는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토착왜구들이 대를 이어 발호하게 만든 한국사회의 책임도 있다. 이 폭염에 한 퇴물 야당정치인은 ‘한강의 기적이 친일’때문이라며 ‘지금은 친일을 할 때’라는 헛소리마저 늘어놓고 있다. 한국이 자랑하는 한강의 기적은 일본의 경제학자로부터 실속없는 ‘가마우지 경제’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기도 하다. 아베 총리는 한국의 가마우지 경제가 가진 빈틈을 노리고 칼을 빼들었다. 비열한 사무라이처럼….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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