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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산악에 이어진 삶 “나는 대구 레포츠 산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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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춘호기자
  • 2019-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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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등산카페 ‘에이스’ 김창길 대표

1980년대 스킨스쿠버 전문점 지역에 첫선

극한정신 무장한 1세대 레포츠맨이 고객

산과 물에 미친자들의 연대기와 동고동락

1980년대 초 대구에서 첫 스킨스쿠버 전문점을 차리고 90년대 대구에서 스키교실을 통해 레포츠문화 활성화에 일조를 한 남구 봉덕동 등산카페 ‘에이스’ 김창길 대표.
모든 분야에는 ‘여명기’라는 게 있다.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밝음과 어둠의 경계. 거기는 ‘난공불락’이라서 성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당연히 소심한 일반인은 거기 서기를 두려워한다. 어둠이 확실히 밝음으로 건너온 걸 확인한 뒤에서야 민초들도 그 길을 소비하기 시작한다. 남보다 먼저 여명기에 투자하려면 블루오션 마인드가 필요하다. 비범한 모험심과 용기다.

북극성처럼 항상 내 삶을 지켜보고 있는 두 명의 모험가가 있다. 한 명은 ‘쿠스토’, 또 한 명은 ‘힐러리경’이다. 쿠스토는 나를 수중의 세계, 에베레스트의 영웅인 힐러리는 산악의 세계에 빠지게 했다. 산에서 발원한 물은 강이 되었다가 궁극에는 바다에 닿는다. 내 삶의 전반부는 그 바다속에 침잠해 있었고, 후반부는 물에서 나와 산과 인연을 맺는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대단한 탐험가도 아니다. 그냥 ‘외길 레포츠 사업가’. 레포츠, 1970~80년대만 해도 하루하루 먹고살기 빠듯한 소시민에겐 그 말이 아주 불량스럽고 시대착오적이고 사치·퇴폐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스쿠버를 빨갱이보다 더 위험하게 보는 이들도 있었다. ‘남들은 뼈 빠지게 일하는데 그늘에서 놀고 먹는 못된 자’로 폄훼한 것이다.

제조업이 판을 치던 시절, 나는 대구에서 선두적으로 수상레저용품점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여가 운동가’로 종횡무진할 수밖에 없었다. 83년쯤 국제공인 스쿠버 자격증을 취득한 나는 중구 동인호텔 부근에 ‘대구잠수’란 지역 첫 스킨스쿠버 전문점을 오픈했다. 그걸 더욱 활성화시킨 업체는 TK레포츠의 이태균 대표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는 0.001%만을 위한 레포츠였다. 1세대 레포츠맨들은 하나같이 ‘극한의 정신’이 빛났다. 지난 6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등산 전문 잡지인 월간 ‘산’ 창간 50주년 기념특집호를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고(故) 고상돈, 고 박영석, 고 지현옥, 김창호, 고미영, 엄홍길, 허영호, 한완용, 김재수, 오은선, 김미곤, 박정헌….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는 히말라야 14좌 연봉을 등정하거나 탁월한 등반가 26명의 면면이 소개됐기 때문이다. 국내 아웃도어 메이커들도 그들의 후원자였다. 히말라야 연봉에 애국가처럼 울려퍼진 노스페이스, 블랙야크, 밀레, 레드페이스, 코오롱, K2….

나는 아직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조차 오르지 못했다. 에베레스트는 언감생심. 나 같은 사람에겐 그냥 히말라야 연봉이 보이는 해발 3천500m 네팔 푼힐 전망대가 제격이다. 하지만 나는 산과 물에 미친자들의 연대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는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고어텍스 기능이 장착된 프리미엄 등산복을 주도적으로 팔았다. 하지만 20여년 전성기를 구가하던 한국 아웃도어 등산복 시장은 반조각이 나버렸다. 그렇게 많던 아웃도어 매장이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있다. 국내 아웃도어 트렌드가 급변한 탓이다. 이젠 등산보다 트레킹이 선호된다. 동호인 단위보다 가족 위주의 산행이 인기다. 하산주보다 커피류가 사랑받는다. 판에 박힌듯한 신제품, 그런 건 소비자의 장롱에 수북하게 쌓여있다. 새 옷과 헌 옷 간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게 현재 아웃도어 시장의 치명적 약점이다. 반면 새로운 기능성 등산화에 대한 수요는 급증하고 있다. 캠핑붐에 따른 신개념 텐트와 배낭…. 기존 아웃도어는 그 욕구를 제대로 충족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나는 북구 칠성동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대한방직 근처에서 쇠를 다루는 공장(대양주물·대양발동)을 운영하셨다. 바로 옆에 그 유명한 승리기계도 있었다. 청소년기, 난 돈이 별로 무섭지 않았다. 돈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도 몰랐다. 그냥 아버지 지갑이 내 호주머니라 여겼다. 철부지 시절이었다. 점차 공부는 나한테서 멀어져만 갔다. 비어있던 공부 자리를 운동이 독차지해 버렸다.

나는 서부권투구락부에 들어갔다. 권투는 물론 유도, 공수도, 태권도 등을 배웠다. 흥미롭게도 우리 가족은 스포츠패밀리였다. 모두 그 구락부 일원이 된다. 어릴수록 자기 기술을 과신하게 된다. 나도 그랬다. 나는 당시 무술영화의 히어로였던 이소룡과 왕우 흉내를 곧잘 냈다. 문방구에서 쌍절봉을 구입해 친구들 앞에서 괴성을 지르면서 내가 이소룡이란 듯이 으스댔다. 그렇게 운동을 옆구리에 끼고 5년을 빈둥빈둥 우쭐거리며 돌아다녔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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