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산(대구출신) 독립지사의 광복군행진곡 ‘초라한 엔딩’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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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14 07:05  |  수정 2019-08-14 07:06  |  발행일 2019-08-14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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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두산과 아들 정호·동호 3부자의 생가인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 668번지. 생가엔 그 흔한 간판이나 안내판 하나 없다.

1940년대 한국광복군이 즐겨 부른 ‘광복군행진곡’과 ‘선봉대가’를 작사·작곡한 지역 출신 독립지사 이두산(본명 이현수). 그의 장남 이정호와 차남 이동호 역시 독립운동에 투신해 3부자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74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그의 생가(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 668)엔 그 흔한 간판이나 표지판 하나 없어 쓸쓸함을 더해주고 있다. 12일 찾은 그의 생가는 평범한 농가주택으로 기와집 두 채와 슬레이트집 한 채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3부자 독립운동가가 이곳에서 태어났는지는 마을 사람들도 잘 모른다.

 

1940년대 널리부른 노래 만들고
편집장·군인으로 日에 맞섰지만
달성 명곡 생가 표지판조차 없어
정호·동호 두 아들도 독립 투사


광복회 대구지부에 따르면 1896년 명곡리에서 태어난 이두산은 1915년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2년 뒤 숭실전문학교를 다니다 중국 상하이로 갔다. 1919년 4월 임시정부(이하 임정)가 수립되자 독립의 길은 무장투쟁밖에 없다고 생각해 이듬해 6개월 과정의 임정 산하 육군무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해 대구에 돌아와 임정이 발행한 독립공채를 모집하다 일본경찰에 들켜 3년형을 선고받고 1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는 1925년 두 아들을 데리고 다시 상하이로 가 임정 외곽단체인 병인의용대에서 활동했다. 장남과 함께 푸젠성 샤먼대에서 공부한 그는 30년 한국독립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35년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인 민족혁명당에 두 아들과 함께 참여했다. 37년 중일전쟁 후 한중 및 동남아간 연대를 강화하고자 ‘동방전우’란 잡지를 발간하고 조선의용대의 기관지인 ‘조선의용대통신’ 편집장을 맡아 일제에 맞섰다. 이때 두 아들은 조선의용대에 입대했다. 1943년 좌우합작으로 임시정부가 구성되자 그는 이상화의 형 이상정 장군과 함께 임정에 참여, 법무부 차장 등을 역임하다 45년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장이 됐다.

장남은 광복군으로 활동하며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으로 참여했다. 광복 후 총무처에서 잠시 근무하다 영남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한 뒤 미국으로 이민했다. 3부자 중 유일하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차남은 의용대에서 팔로군으로 활동하다 월북, 인민군 대좌를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46년 국내에 돌아온 이두산은 진보정당을 창당해 활동하다 6·25전쟁 중 납북됐거나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광복군행진곡은 1940년 광복군 창군과 동시에 불린 노래로 광복군의 깃발을 높이 날려 왜적을 무찌르고 조국 광복을 쟁취하자는 노래다. 마지막 절엔 ‘독립 후 민주국가를 세워보자’는 가사가 담겨있다.

독립운동가들이 널리 불렀던 ‘독립운동가’ ‘신흥무관학교교가’가 미국 남북전쟁 때 북군이 만든 ‘조지아 행진곡’의 선율을 차용해 개사한 것이라면 ‘광복군행진곡’은 순수 창작곡이다.

역사사회학을 전공한 김영범 대구대 교수(사회학과)는 “생가를 알리는 표지판이나 안내판 설치는 물론 이두산 지사에 대한 서훈도 고민해봐야 한다. 그는 언론인이었으며 군인이었고 음악가이기도 하다”면서 “대구가 자랑할 만한 독립운동가”라고 말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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