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윤 칼럼] 전환기, 생각을 바꿀까 맞설까

  • 이재윤
  • |
  • 입력 2019-08-16   |  발행일 2019-08-16 제23면   |  수정 2019-08-16
[이재윤 칼럼] 전환기, 생각을 바꿀까 맞설까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을사조약 사흘 뒤 게재됐다. 일본이 고종황제의 승인 없이 외교권을 강제 박탈했으니 당시 대표적 지식인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으리라. 장지연의 ‘대곡(大哭)’은 투옥과 압수(押收), 정간(停刊)의 고초로 이어졌지만, 오랫동안 애국적 명문에다 정론직필의 사표로 여겨졌다. 그는 그렇게 격변의 시대에 맞섰다. 아픈 비사도 있다. 민족언론인으로 알려진 그가 실은 러일전쟁 때 ‘대동아 공영’을 표방했다. 일제강점기엔 총독부 기관지에 꾸준히 일본을 찬양하는 글도 게재했다.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이 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서훈 취소-서훈 취소결정 무효의 우여곡절도 그런 연유에서 생긴 일이다. 그는 일본이라는 거대한 신사조 앞에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 신념과 현실의 불일치, 소위 인지부조화의 고통 앞에 선 장지연. 그는 생각을 바꿀지, 현실에 맞설지 고뇌했을 것이다.

전환기다. 생각을 바꿀지, 변화에 맞설지 선택할 때가 다시 왔다. 일본이 시비를 걸어온 것은 큰 변화의 한 줄기일 뿐이다. 더 거대한 물결이 오고 있다. 시대흐름을 읽지 못하면 눈앞 현상도 이해하기 어렵다. 왜 미국은 동맹 한국에 시도때도 없이 막대한 청구서를 내밀까. 트럼프가 북한에 맞장구치며 ‘(한미연합훈련) 나도 싫다’고 한 배경은 무엇일까. 북 비핵화는 왜 가다 서다를 반복하나. 미·러가 중거리핵전력조약을 탈퇴하고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한국 배치설로 군비경쟁의 우려를 낳는 까닭은 무엇인가. 일본이 이웃 우방에 경제도발을 자행하고, 미국이 일본 편을 드는 듯한 이유도 궁금하다. 우리 경제에 절체절명의 위험신호를 알린 미중 무역전쟁은 도대체 언제 끝날 건가. 의문 투성이인 이런 현상을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답을 찾기 힘들다. 거대한 흐름 속 한 묶음으로 봐야 제대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 변화를 ‘슬로벌라이제이션(Slow+Globalization)’이라 규정한다. 세계화의 퇴조다. 세계화는 수십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룰이다. ‘포스트 세계화’의 신사조가 유독 한반도 주변에서 압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탈세계화 시대의 지배적 룰은 무엇인가. 자국이익 우선주의, 국제 분업체계 쇠퇴, 보호무역주의 강화, 국가간 교류 감소, 저성장, 각자도생의 국수주의, 극우 민족주의 득세, 군비 경쟁, 자유무역주의 위기, 불확실성의 확대, 격화되는 경제전쟁 등이다. 강대국들은 이런 룰로 새 판을 짜려 한다. 탈세계화란 시선으로 작금 한반도 주변의 ‘의문’들을 바라보면 해석이 어렵지 않다. 탈세계화는 세계화의 우등생 한국에 변화를 요구한다. 수출로 먹고살고, 대외의존도가 높으니 변화를 피할 수 없다. 변화로 변화에 맞서야 한다. 무엇을 바꾸고 무엇에 맞설 것인가.

최우선 과제는 자생력을 키우는 일이다. 산업구조도 천천히 바꿔가야 한다. 세계화 시대 덕목이었던 상호의존성이 되레 공격 무기로 변신해 우방의 목젖을 겨누고 있다. 선진국이 리쇼어링(Reshoring·제조업 본국 회귀)을 추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려울 때 귀한 것을 알게 된다. 한일갈등, 미중무역전쟁의 소용돌이에 기업의 소중함이 새삼 부각됐다. 기업이 위기극복의 전위대다.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도 바꿀 수밖에 없다.

냉전체제에는 맞서야 한다. 신냉전구도는 갈수록 강화될 것이다. 미중갈등은 우리에게 어느 편에 설지를 강요한다. 이 구도에서 돌아갈 곳은 한미일 3각 안보 축뿐이다. 여기에서 이탈하면 생존에 위협 받는다. 미국의 방위비 분담 요구, 군사정보보호협정·호르무즈 파병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위기 때 어정쩡하면 친구와 적 모두에게 두들겨 맞는다.

전환기는 항상 있다. 광복과 정부수립, 분단과 전쟁, 4·19, 5·16, 10·26, 광주항쟁,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 IMF 관리체제가 그랬다. 따지고 보면 적지 않다. 그만큼 격변의 연속이었다. 전환기마다 새로운 생존력, 적응력을 발휘해 국가를 더욱 부강시킨 것은 대한민국의 저력이다. 일본의 공격은 잠자던 그 저력을 일깨워줬다. 역설적으로 고맙다.

논설실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