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성지 상주 .7]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은 의병장 노병대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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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19   |  발행일 2019-08-19 제12면   |  수정 2019-08-19
고종 밀조 받고 창의…日帝의 고문에 한쪽 눈 잃고도 당당히 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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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금포 노병대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숭렬사.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에서 태어난 노병대는 을사조약 후 의병을 일으켜 경북은 물론 충북, 전북, 경남을 넘나들며 왜병과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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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대의 부인 의성김씨가 투신했다고 전해지는 연못. 손자 노진영씨에 따르면 연못 바로 옆쪽에 노병대가 나고 자란 큰 기와집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는 노병대가 옥고를 치르는 와중에도 그의 집과 재실에 불을 질러 모두 불태웠다.

상주의 항일독립운동을 이야기할 때 맨 먼저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의병장 노병대다. 유생 출신인 그는 후기의병 활동에 큰 족적을 남겼다. 고종의 퇴위와 군대 해산이 기폭제가 된 후기의병은 전면적인 항일 전쟁의 성격을 띠었으며, 의병사 중 가장 많은 업적을 기록했다. 당시 노병대는 고종으로부터 직접 밀조를 받아 의병을 창의한 뒤 보은·청주·성주·거창·무주 일대에서 일제에 맞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특히 그는 갖은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는 기개를 보여 오히려 일군을 당황케 했다. 죽는 순간까지 호국을 실천한 그의 정신은 시대를 넘어 우리의 가슴 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1. 내 마땅히 성인을 위해 죽으리라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의 손에 살해된 을미사변과 이후 시행된 을미개혁의 여파로 전국이 뒤숭숭하던 1895년(고종32) 10월, 성균관 앞에 비장함이 흘렀다.

“향교와 서원을 훼철하라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

상주 사람 노병대의 일성이 묵직하게 흘렀다. 그리고 그 곁에 진사 허운(許運)이 힘을 보태고 있었다.

금포(錦圃) 노병대(盧炳大)는 1856년 12월4일, 상주 화동(化東) 이소리(以所里)에서 노종구(盧宗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노병직(盧炳稷), 조선 전기에 이름을 떨친 소재(齋) 노수신(盧守愼)의 아우 후재(厚齋) 노극신(盧克愼)의 후손답게 어려서부터 남다른 구석이 많은 인물이었다. 겨우 일곱 살 때 글을 줄줄 읽고 외웠을 뿐만 아니라 열 살에 이르러서는 직접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대 유림의 종장이었던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눈에 들어 열세 살 때부터는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이후 1880년에 김원덕(金遠德)의 딸 의성김씨(義城金氏)와 혼인해 가정을 꾸린 노병대는 1889년에 창릉(昌陵, 조선 제8대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을 관리하는 참봉(參奉) 직을 맡아 소임을 다하였다.


1907년 8월 속리산서 의병 일으켜
보은·성주·거창 등서 혁혁한 전과
1908년 일본군에 체포돼 모진 고문
고향 종택 불타고 부인마저 자결
출옥 후 재기 도모하다 다시 체포
옥중단식 28일만에 피 토하고 순국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향교와 서원을 훼철하라는 명이 또 떨어진 것이다. 노병대가 열다섯 살이던 1871년에 흥선대원군이 내린 서원철폐령으로 이미 풍비박산이 난 지경이었기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하여 “내 마땅히 성인을 위해 죽으리라”하는 각오로 도성으로 올라왔고, 바로 지금 성균관 앞에 무릎을 꿇은 터였다.

“전하. 부디 어명을 거두어 주소서.”

하지만 임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낙심한 노병대는 짐을 꾸려 허운과 함께 중국 곡부(曲阜)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렵사리 만난 공자의 72세 사손에게서 조정과 태학에 충고하는 글을 받아 귀국했다. 그 만큼이나 간절한 심정으로 향교와 서원의 훼철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노병대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2. 눈을 잃었다고 뜻까지 잃으랴

노병대의 나이 마흔아홉 되던 1905년, 통한의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노병대는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는 곧바로 도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전 이조판서 이용원(李容元)을 찾아갔다.

“전하께서 밀조를 내려주신다면 그 뜻을 믿고 거사를 도모하고자 합니다. 전하께 아뢰어주십시오.”

이를 전해들은 임금이 반색하며 “노병대에게 분충정난(奮忠靖亂) 2등을 내리고 특차비서원비서승(特差秘書院秘書丞)을 제수한다”라는 조서를 비밀리에 내렸다. 합당한 벼슬로 힘을 실어주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노병대는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들을 모아 거사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2년이 지난 1907년 8월에 이르러서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당시 경기도 광주에 살던 임용헌(林容憲), 충남 연산에 사는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 등과 함께 속리산에서 일으킨 이른바 ‘노병대부대’가 그것이었다. 이때 소요된 막대한 자금은 전부 노병대가 감당했다.

‘노병대부대’의 창의 소식에 ‘서울시위대’와 ‘청주진위대’의 해산병 200여 명이 합세해왔다. 이로써 부대의 규모는 며칠 사이에 무려 1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노병대는 김운로를 부대의 맹주, 즉 우두머리로 추대하고 전열을 정비했다.

부대는 첫 작전으로 보은(報恩)을 습격해 일본인 2명을 사로잡고 상주의 청계사(淸溪寺)로 진을 옮겼다. 하지만 적병의 급습으로 청주 미원(米院)으로 다시 옮겼고, 그 과정에서 적 5명을 또 생포했다. 문제는 미원이 오래 머물만 한 장소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원은 가파른 협곡이었다.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1천여명의 대부대가 그런 곳에 진을 치고 있다가는 몰살당할 위험이 있었다. 노병대를 비롯한 지휘부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중 한 부대를 노병대가 인솔했다.

노병대와 그의 부대가 성주에서 적 10여명을 사로잡은 데 이어 우두령(牛頭嶺)을 넘어 김천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매복해있던 일군이 공격해왔다. 전투는 치열했고, 살아남은 자는 고작 50여명에 불과했다. 노병대는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다시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1908년 7월13일, 보은에서 청주수비대 소속 일군에게 체포되고야 말았다.

노병대를 묶어두고 헌병대장이 질문을 쏟아냈다.

“의병을 일으킨 연유가 무엇이냐?”

“너희 종족은 우리의 원수다. 당연히 다 없애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함께 일을 꾀한 자들을 낱낱이 대라.”

“내가 주모자다. 다른 이들에 대해선 알 것 없다.”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거사할 때 이미 죽을 사(死) 자를 이마에 붙여놓은 바다. 속히 죽여라.”

노병대가 음식까지 거절하자 일제는 그를 공주재판소로 압송했다.

공주 상황은 청주와 달리 지독해서 고문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별다른 소득을 얻어내지 못한 일제는 급기야 노병대에게서 왼쪽 눈을 앗아갔다. 끔찍한 만행으로 육신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노병대는 죽기를 결심하고 단식을 시작했다. 하지만 악에 받친 일제는 그조차도 마음대로 못하게 했다. 노병대가 혼수상태에 빠지면 음식물을 강제로 투입해 깨어나게 한 후 다시 고문과 회유를 이어간 것이다. 그래도 아무런 효과가 없자 결국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리고 폭도내란의 죄를 물어 10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1908년 9월의 일이었다.

그렇게 옥에 갇힌 그에게 식솔이 찾아왔다. 식솔이 들고 온 소식 앞에서 노병대는 참담한 심정으로 하나밖에 없는 눈을 감았다. 일제가 불을 지른 탓에 이소리의 야로당(野老堂) 종택이 잿더미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전답 300두락과 산 8필지를 비롯한 전 재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모두 소진한 터였다.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몰린 가족들 고생이 어떠할지 짐작이 갔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부인께서 집 앞 연못에 몸을 던지셨습니다.”

30년 가까이 함께 한 아내 의성김씨의 투신자결 소식에 노병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견디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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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렬사 입구에는 의병장 노병대의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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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터 인근 노병대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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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교육지원청 교육관에 가면 의병장 노병대 기념비를 볼 수 있다.

#3. 몸을 비워 죽으리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10년, 전국에 사면령이 내려졌다. 한일합방을 축하한다는 명분이었다. 석방 대상에 노병대도 포함이 되었다.

“도적떼나 다름없는 네놈들의 경사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라를 구하려던 뜻을 이루지 못한 한이 천추에 맺혔으니, 난 여기 옥에서 죽을 것이다.”

노병대가 완강히 저항했지만 결국 쫓겨나다시피 출옥되었다.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여겼던 노병대는 주저하지 않고 재기를 도모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군자금과 군량미였다. 이를 조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던 1912년 11월이었다. 비안군 모창면에 있는 최덕노(崔德老)의 집에 노병대를 비롯해 강봉주(姜鳳周), 손요득(孫了得), 안병모(安炳謨), 허찬(許燦)이 모였다.

“군자금을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안동 풍남면 화회동에 사는 류 참봉이 뜨르르한 재산가라고 하니 그에게 협조를 부탁하는 겁니다.”

이에 11월 18일에 류 참봉의 집을 찾아가 거액의 현금을 받아냈다. 이때 혹시 모를 일제의 기습에 대비해 총기까지 지참하는 등 만전을 기했다. 하지만 이 일이 발각되면서 1913년 6월5일에 다시 체포되고야 말았다. 사건을 맡은 대구재판소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죄목은 강도였다. 나라에 대한 우국충정이 파렴치한 강도행위로 몰렸다는 사실에 노병대는 절망했다.

“국권회복을 위해 지금까지 공들여온 모든 일이 허사가 되었구나. 내 나이 이제 60이 다 되었으니 더 살아 무엇 하겠는가.”

이에 옥중 단식에 들어간 노병대는 28일 뒤 피를 토하고 순국했다. 1913년 7월9일이었다.

노병대의 정신은 후손들에게 전해졌다. 1964년 상주 유림에서 ‘모의계(慕義契)’를 결성해 해마다 열고 있는 취회(聚會)가 그것이다. 취회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이고 흩어지는 모임을 이른다. 나라에서도 잊지 않았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그 뜻을 기린 것이다.

노병대 순국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루었고, 오직 나라가 있음만 알고 내 몸은 생각하지 아니하였구나. 해를 꿰뚫는 곧은 충의가 문폐(文陛, 조정)와 같으니, 비석에 크게 새겨 뭇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노라.”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광복70주년 상주의 항일독립운동, 상주문화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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