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남 담양 후산마을 명옥헌 원림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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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23   |  발행일 2019-08-23 제36면   |  수정 2020-09-08
네모 연못속엔 선홍빛 꽃물결 배롱나무가 자라는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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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 원림의 하지. 연못 속에 배롱나무가 자라는 섬이 있다.

입추가 지나도록 아직 올해 남도의 배롱나무 꽃을 보지 못하였다. 정신적인 습관도 노쇠하여 무감해지는지라, 며칠 전 대구 두류공원에서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면 혹은 그보다 먼저 이성복의 시 ‘그 여름의 끝’을 꺼내보지 않았더라면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이 계절의 인상을 떠올리지도 않은 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혹여 긴 겨울을 후회로 지새울지 어찌 알겠나. 고속도로가 전라도 땅을 밟자 휴대폰이 굉음을 내며 메시지를 전한다. 전남 폭염특보다. 괜찮다. 폭염에도 하물며 폭풍에도, 그 꽃은 ‘석 달 열흘’ 동안 피고 진다는 약속을 어기진 않을 게다.

인조반정 인재찾아 후산마을 온 능양군
말고삐 맨 은행나무‘인조대왕계마행’
배롱나무 붉은 꽃들에 둘러싸인 연못
두개 못 사이 몇걸음 물러선 ‘명옥헌’
우암 송시열이 새긴 명옥헌 바위글씨
정자 방문 속으로 들어와 가득채운 꽃

◆후산마을과 명곡 오희도

과연 그렇다. 여름 배롱나무 꽃으로 이름난 명옥헌원림(鳴玉軒園林)으로 가는 길, 산덕리(山德里) 후산(後山) 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길가에 이미 배롱나무 꽃이 만발이다. 이름만큼 들고나는 차들도 심심찮다. 초입의 너른 주차장에 내려 이정표 따라 걷기 시작한다. 마을 입구에 차단기가 내려져 있다. 주차장이 있어도 꾸역꾸역 좁은 고샅길을 점령하는 차들 때문에 특단의 조치를 내린 듯하다. 차단기 너머에 286년 되었다는 느티나무 보호수가 확성기 철탑과 나란히 서 있다. 아름드리 왕버들과 투명한 연꽃이 피어난 연못을 지나 구불구불 마을길을 오른다. 한옥과 양옥이 어우러진 30여 가구의 마을. 집들과 이웃한 텃밭에는 감나무와 옥수수, 고추 따위가 자랄 뿐 꽃은 드물다.

원래 후산마을은 600여 년 전 순천박씨가 정착한 마을이라고 한다. 광해군 시절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는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어머니 박씨와 함께 외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왔다. 그는 집 옆에 망재(忘齋)라는 조촐한 서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자연을 벗 삼아 살았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중앙에서는 반정의 싹이 트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이후 조선 16대 왕 인조(仁祖)로 등극하게 되는 광해군의 조카 능양군이 있었다. 그는 쿠데타에 동참할 지지 세력과 인재를 찾아 전국을 돌다 이곳 후산마을의 오희도를 찾아온다.

명옥헌 원림을 300m 앞두고 길이 갈라진다. 왼쪽으로 가면 후산리 은행나무가 있다. 오희도를 찾아 온 능양군이 말고삐를 맸다는 나무다. 그래서 나무는 ‘인조대왕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 또는 ‘인조대왕계마상(仁祖大王繫馬像)’이라고 부른다. 능양군은 오희도를 세 번 찾아왔다고 전한다.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를 세 번 찾았듯이. 그러나 오희도는 노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능양군의 청을 거절한다. 대신 전남 나주의 박효립을 천거했다. 박효립은 반정을 위한 거사의 그날 궁궐의 문을 열었던 인물이다. 인조의 집권 후 오희도는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으나 그해 천연두에 걸려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먼 눈으로 은행나무의 솟구친 우듬지를 훑고는 명옥헌으로 향한다. 텃밭에 고추가 붉다.

◆명옥헌 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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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에서 바라본 명옥헌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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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 원림의 상지. 네모난 연못 속에 바위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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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이 새겼다는 ‘명옥헌 계축’ 바위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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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 정자문 속에 배롱나무 꽃이 가득하다.



집들의 담벼락 그림들이 원림까지의 거리를 알려준다. 270m, 50m, 그러다 갑자기 밝은 빛과 함께 탁 트인 공간이 펼쳐지고 배롱나무 꽃들에 둘러싸인 연못이 나타난다. 연못 앞에 한옥 한 채가 서 있다. 담벼락 밑에는 들깨와 고추가 널려 있고 활짝 열린 대문간에서는 한 할머니가 감식초와 감말랭이, 갓 쪄낸 옥수수를 팔고 계신다. “아이고 할머니, 문 앞에 이래 좋은 정원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실까.” 얼굴이 땀에 젖은 중년의 남자가 파라솔 아래로 고개를 들이밀며 다정하게 말한다.

배롱나무 붉은 꽃들의 아우성 너머로 기와지붕 한 조각이 보인다. 천천히 연못의 왼쪽 가장자리를 따라 들어간다. 일렁이는 꽃물결에 휘청한다. 선홍빛 꽃들 사이로 머리에 팔작지붕을 이고 있는 아담한 정자가 다소곳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부러 정자를 멀리에 두고 계류를 따라 오른다. 정자의 옆모습이 슬쩍 보이는 배롱나무 숲속에 사각의 작은 연못이 나타난다. 연못에서 몇 발자국을 더 오르면 작은 바위에 ‘명옥헌계축(鳴玉軒癸丑)’이라고 새겨져 있다.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한다. 오희도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넷째 아들인 장계(藏溪) 오이정(吳以井)이 부친을 이어 은거했다고 한다. 이후 오이정의 차남 오기석(吳紀錫)이 머물렀는데, 그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이 ‘명옥헌’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연못을 조성한 이는 오기석의 아들(안내판에는 손자라고 되어 있으나 한국학 족보 자료에 따르면 아들이다) 오대경(吳大經)이다.

‘명옥헌계축’ 바위 아래에서 계류는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 줄기는 위쪽의 작은 연못인 상지(上池)를 채우고 다시 아래 연못으로 흘러간다. 또 하나의 물줄기는 곧장 아래 연못인 하지(下池)로 향한다. 이때 ‘물이 흐르면 옥구슬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 ‘명옥’이다. 상지는 선명한 네모다. 가운데에 바위가 놓인 수중암도(水中巖島)의 형상이다. 하지는 원형에 가깝게 보이지만 네모라고 한다. 그 안에 배롱나무가 자라는 섬이 있다. 방지원도(方池圓島)다. 이 두 개의 연못 사이에 몇 걸음 물러선 정자가 자리한다.

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다. 가운데에 방을 두고 사방을 마루로 열었다. 정자에는 ‘명옥헌’과 ‘삼고(三顧)’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삼고’는 능양군이 반정을 위해 오희도를 찾았던 일을 기억하고자 송시열이 썼다고 한다. 명옥은 원래 벼슬아치들이 입은 관복에 장식으로 단 구슬인 패옥이 부딪히는 맑고 투명한 소리를 말한다. 패옥의 소리가 물소리와 같다는 비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금 물소리는 들리지 않고, 정자의 마루에, 기둥에 기대앉은 사람들의 낮은 음성들이 명옥이다.

정자 방문 속에 배롱나무 꽃 가득하다. 배롱나무는 중국 자미성에서 왔다고 ‘자미목(紫薇木)’이라고도 하고, 100일 동안 꽃이 피고 지는 나무라 해서 ‘목백일홍’이라고도 한다. 나무 잘 타는 원숭이도 이 나무에서는 떨어진다 해 ‘미끄럼 나무’라는 별칭도 있다. 둥치에서 간지럼을 태우면 그 끝이 연신 흔들거린다 해서 간지럼 나무라고도 부른다. 또 남도사람들은 이 꽃이 지고 나면 비로소 쌀밥을 먹을 수 있다 해서 ‘쌀밥나무’라고 했다.

자라면서 표피를 스스로 벗어 겉과 속이 같으니 이 나무는 ‘단심(丹心)’을 의미한다. 사실 원림의 배롱나무는 가장 오래된 것이 150년 정도다. 20그루 정도가 100년을 넘겼고 나머지는 20~30년생이다. 사실이란 것들이 한껏 들뜬 마음에 재를 뿌리지는 않는다. 올해의 꽃을 보았다는 이 단순하고도 흡족한 마음 역시 단심이라.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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