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寺미학 .12] 사찰과 배롱나무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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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29 07:52  |  수정 2021-07-06 10:29  |  발행일 2019-08-29 제22면
唐 현종이 양귀비보다 사랑한 나무, 사찰의 여름 ‘붉게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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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 선암사 적묵당 앞의 두 그루 배롱나무. 이 배롱나무는 100년 전 옆에 있던 못을 메우고 건물을 지을 때 건물 터에 들어가지 않아 살아남았다고 한다.

무더위 속에 짙고 무거운 녹음의 기운이 지배하는 여름철. 배롱나무는 이런 계절에 맑고 붉은 꽃을 흐드러지게 피워 사람들에게 기쁨과 활기를 선사한다. 배롱나무꽃은 꽃이 잘 보이지 않는 여름에 연꽃과 더불어 무더위로 쌓이는 답답함과 무기력을 잠시나마 날려버리는 고마운 존재로 다가온다.

근래 들어 배롱나무를 가로수나 정원수로 많이 심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서원이나 고택, 정자, 선비들 무덤, 그리고 오래된 산사에 가야 붉은 꽃으로 뒤덮인 배롱나무의 풍모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곳에 가면 오래전에 심은 배롱나무들이 여름철 내내 풍성하게 피워내는 붉은 꽃의 강렬한 아름다움과 멋진 자태로 보는 이를 혹하게 한다. 이런 배롱나무를 탐방하며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하나의 멋진 피서 방법이 될 것이다.

강진 백련사에 가면 보기 드물게 크고 멋진 수형을 자랑하는 배롱나무를 만날 수 있다. 누각인 만경루 앞에 있다. 어디서 보나 멋진 자태를 보이는 이 나무는 수령이 300년은 된 듯하다. 붉은 꽃을 수놓은 커다란 양산을 펼친 것처럼 보인다. 주변에서 감상하고 나무 아래 앉아서 즐기는 것도 좋지만, 만경루 위에서 보는 풍광은 더욱 멋지다. 누각 아래를 통과해 계단을 올라 뒤돌아서면 조선의 명필 원교 이광사의 독특한 글씨 ‘만경루(萬景樓)’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이 편액을 감상한 뒤 시원한 누각 마루에 올라 강진 앞바다를 배경으로 배롱나무를 감상하는 맛은 각별하다. 이만한 풍광을 어디서 누릴 수 있을까 싶다. 백련사에는 이 배롱나무와 함께 대웅보전 옆, 명부전 앞에 각각 한 그루씩의 배롱나무가 더 있다.

◆대부분 산사 배롱나무 고목 몇 그루씩

밀양의 표충사에도 배롱나무가 많다. 곳곳에 있는 100년 또는 200년 정도 되어 보이는 배롱나무 10여 그루가 한여름 산사를 붉게 물들이며 별천지로 만든다. 일주문을 지나 참나무 숲길이 끝나는 곳에서 만나는 누각 아래를 지나면 눈앞에 나타나는 배롱나무가 탄성을 지르게 한다. 지난 8일 다녀왔다. 붉은 꽃을 피운 배롱나무 두 그루가 가지를 늘어뜨려 사천왕문으로 오르는 계단 양쪽에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불국사 석가탑을 닮은 삼층석탑이 서 있는 넓은 마당이 나온다. 석탑 주위에 매화나무 고목 한 그루와 배롱나무 여섯 그루가 전각들 앞이나 안에서 각기 다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관음전 뒤에도 한 그루의 배롱나무가 녹음 속에 붉은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부처 꽃공양 위해 심은 선운사 등
고찰 곳곳 수백년 된 배롱나무들

매년 껍질벗는 나무 특징서 비롯
수행자엔 번뇌 벗어버리란 의미


지난 12일에는 조계산 선암사와 송광사를 찾았다. 선암사에도 배롱나무 고목들이 몇 그루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키가 큰 배롱나무 두 그루가 붉은 꽃을 피우고 있고, 범종루를 통과하니 유명한 선암사 뒷간으로 가는 길 옆에 붉은 ‘꽃동산’ 두 개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커다란 배롱나무 두 그루가 꽃을 한창 피우고 있었다. 가장 멋진 배롱나무 앞에 다가가니 그 배롱나무는 적묵당 마당에 서 있었다. 적묵당 앞에는 배롱나무 두 그루가 양쪽에 서 있다.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두 그루의 배롱나무에 파묻힌 적묵당(寂默堂)의 주인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잠시 둘러보다 오른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삼성각 옆의 배롱나무가 또 눈에 들어왔다.

송광사 역시 고찰답게 배롱나무가 많다.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건너는 다리인 능허교 위의 우화각을 지나니, 양쪽에 서 있는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맞이했다. 다시 종고루(鐘鼓樓) 아래를 지나 대웅전 앞 넓은 마당에 올라서자 이곳저곳에 붉은 꽃을 활짝 피운 배롱나무들이 눈길을 끌었다. 승보전 옆, 지장전 옆, 관음전 앞, 보조국사감로탑 주위 등에 고목 배롱나무들이 붉은 꽃을 피워 넓은 산사 경내 곳곳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특히 선원 뒤편에 있는 배롱나무가 꽃을 왕성하게 피워 기분을 흡족하게 했다.

대부분의 고찰에는 이처럼 배롱나무 고목들이 있다. 부처에 대한 꽃공양을 목적으로 대웅전 앞 양쪽에 심었다는 수령 200년(또는 300년) 정도의 고창 선운사 배롱나무를 비롯해 김제 금산사, 김천 직지사, 양산 통도사, 구례 화엄사, 하동 쌍계사, 장성 백양사, 서산 개심사 등의 배롱나무도 유명하다. 계룡산 신원사에도 아주 오래된 배롱나무 고목이 있고, 영동 반야사에는 500년이 넘었다는 배롱나무가 있다.

◆산사에 배롱나무 심은 이유

배롱나무는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하여 백일홍(百日紅)이라 불리었다. ‘백일홍’이 ‘배길홍’으로 바뀌고, 이것은 다시 ‘배기롱’을 거쳐 ‘배롱’으로 변해 배롱나무라는 이름이 된 것이라고 한다. 한해살이 백일홍과 구별해 ‘목백일홍(木百日紅)’으로도 부른다. 중국에서는 간지럼 타는 나무라는 뜻으로 파양수라 하고, 일본에서는 나무를 잘 타는 원숭이조차도 미끄러지는 나무라는 뜻으로 사루스베리(猿滑)라고 한다. 나무줄기는 매끈하고 껍질이 자주 벗겨진다. 꽃은 7~9월에 피고 부귀영화를 상징한다. 꽃은 대개 붉은색이지만, 보라색 꽃과 흰색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다.

중국의 당나라 현종은 배롱나무를 양귀비(楊貴妃)보다 더 사랑했다고 하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음독 순국한 매천 황현은 ‘아침이고 저녁이고/ 천 번을 보고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고 읊으며 이 꽃을 특히 사랑했다.

이런 배롱나무를 사찰에 심는 뜻은 출가한 수행자들이 해마다 껍질을 벗는 배롱나무처럼 세속적 욕망과 번뇌를 벗어버리고 수행에 전념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수행자의 자세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경계의 방편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배롱나무는 특히 여름철에 사찰을 붉게 수놓으며 스님뿐만 아니라 산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각별한 아름다움과 가르침을 주는 존재가 되고 있다. 산사 곳곳의 배롱나무들은 100년 후, 500년 후가 되면 그 사찰의 어떤 스님보다 더 큰 ‘법력’을 보이며, 사찰을 찾는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기쁨과 복을 선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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