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새치기와 교육시스템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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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07   |  발행일 2019-09-07 제23면   |  수정 2020-09-08
[토요단상] 새치기와 교육시스템

“입학정원이 200명인데 지원한 학생은 1천200명이라, 1천명을 제치는 재주가 없으면 입학할 가망이 없다. 수험표를 타는 그들의 얼굴은 모두 불안해보였다. … (중략) … 시험지를 돌린 후 한참 동안 시험지에 번호와 성명쓰기에 분주하더니 다시 시험장이 적막해졌다. 전장에 임한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큰 불안감이 감돌았다. 괴로운 빛으로 몸을 비틀고 손가락도 잡아 뽑고 애를 쓰는 모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석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게 한다.”

위의 기사를 읽고 언제 기사인지 한번 추측해보시길 바란다. 최근 기사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이 기사는, 사실 일제강점기인 1921년 3월2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이다. 중등학교 입학시험을 참관한 기자는 ‘처참함 입학시험 광경’이라는 제목으로 이 기사를 썼다. 비극적이게도 이런 교육시스템이 광복이 되어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 1960년대에는 초등학생들이 극심한 사교육 열풍의 희생양이 되면서 ‘국6병’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오죽했으면 서울시 교육위원회가 1964년에 초등학생의 과외를 하루에 두 시간만 허용한다는 웃지 못할 방침이 나오기도 했다.

1968년에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자 이제는 ‘중3병’이 창궐한다. 이제는 중학생들의 사교육 열풍이 자살을 불러올 만큼 과열되자 결국 1974년에 고교평준화정책을 실시한다. 당시 경기고-서울대 출신들로 대변되는 특권층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전국적으로 확대되지는 못했다. 물론 이런 평준화정책이 여러 가지로 긍정적인 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센 사교육 열풍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이 무렵 사교육비는 연간 2조원 이상이 들었는데, 당시 정부예산의 6%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1980년대는 과외금지조치로 인해 그나마 평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는 10년을 못 넘겼고, 이 시기를 보낸 필자 세대들은 원래 평등하게 경쟁하던 교육이 변질되었다고 착각을 한다. 최근에는 정시비중 확대가 대안으로 제시되지만, 그것이 사교육을 줄여주지는 못한다. 1990년대에는 의대 후배들 중에 고교출신이 없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학교를 다니는 것보다 검정고시를 통해 내신을 확보하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우연인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얼마 후에 수시모집을 시작하면서 학생이탈로 위기를 맞은 사학들에게는 구세주가 되어주었다.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고는 대학을 들어가기 어렵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 교육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뼈대를 친일파 청산을 못한 여파로 인해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에 대한 논쟁이 연일 뜨겁다. 도대체 왜 장관 후보자 한 명 때문에 전례없이 온나라가 이렇게 시끄러워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열기는 대통령 선거도 울고 갈 정도이다. 특히 그의 딸에 대한 입시부정 의혹이 일자 여러 대학의 총학생회에서 입장발표가 잇따르고 집회를 열었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비난이 따라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고 지성 집단이라는 대학들의 입장을 보면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마치 시스템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한 개인이 새치기를 했다면 그 사람만 비난하면 된다는 식이다. 얼굴을 가린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듯이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해서는 아닐까 의심해본다. 개인의 문제를 넘어 앞으로 기득권자들의 새치기를 방지하기 위해서 시스템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 곳은 경북대가 유일하다. 내가 사는 곳의 대학이 핵심을 비켜나지 않았다는 것이 반갑기 그지없다.

사실 시스템의 핵심은 대학에 있다. 사회적 서열이 대학의 서열을 따랐으므로 우리는 어떻게든 자식을 높은 서열의 대학에 진학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열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금과옥조처럼 받드는 사회에서, 혁신을 넘어 파괴적으로도 들릴 수 있는 대학평준화같은 소리를 해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새치기가 자행되었는지 각인했으면 한다. 대학입시뿐만 아니라 취업에서도 유력인의 자녀들이 새치기하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에 대한 비난과 흙수저의 자괴감만 늘어놓으며 시스템에 대한 고민보다는 서열경쟁에서 ‘공정하게’ 이길 생각만 하고 있다.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당신들은 앞으로도 새치기 당했음을 알고 수없이 분노할 것이다. 공평하고 올바른 교육을 위해 시스템을 바꾸고 싶다면 역사적 진실부터 직시해야 한다.
최환석 맑은샘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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