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머리의 작은 기적] 인성교육 - 엄마가 아이에게

  • 최소영
  • |
  • 입력 2019-09-09 08:06  |  수정 2019-09-09 08:06  |  발행일 2019-09-09 제18면
“삶의 ‘리추얼(의식과도 같은 일)’로 아이에겐 사랑, 늦둥이 엄마엔 행복을”
친정살이·육아로 우울감 느끼던 무렵
우연히 접한 책에서‘리추얼’ 알게 돼
목욕때 아이와 심장 맞닿으며 행복느껴
[밥상머리의 작은 기적] 인성교육 - 엄마가 아이에게
일러스트=최소영기자 thdud752@yeongnam.com

공자는 논어에서 마흔이 되니 더 이상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를 담아 ‘불혹’이라 표현했다. 남들 같으면 아이들도 어느 정도 키우고, 직장 생활에서도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해 안정을 이루는 시기가 마흔이리라. 하지만 마흔의 나는 늦은 결혼 탓에 이제 겨우 아이를 출산해 잠을 자면서도 찡찡대는 아이에게 젖병을 물리는 진기명기를 하나둘 쌓아가는 전쟁 같은 시간을 살아내야 했다. 게다가 남편은 전주에서, 나는 대구에서 주말부부로 살다 보니 육아는 그야말로 엄마인 내 몫으로만 존재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남편은 홀로 살고 계신 친정엄마와의 합가를 제안했고, 그렇게 나의 친정살이가 시작되었다.

전 국민이 다 알듯 시집살이, 정말 힘들다. 하지만 친정살이 또한 만만치가 않다. 무엇보다 내가 출근한 사이에 백 일을 갓 넘긴 손녀를 맡아 키우는 친정엄마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했고, 이 스트레스는 퇴근한 나에게 고스란히 퍼부어졌다. 더욱이 내 딸은 직장 다니고 아이 키우고 매일 매일을 정신없이 사는데 주말에만 삐죽 얼굴을 내미는 사위에 대한 친정엄마의 불만은 날로 극에 다다랐다. 친정 식구들 때문에 이혼하는 부부도 많다고 하더니만, 정말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남편과 친정엄마 사이가 파국으로 치닫게 될까봐 그 사이에서 나는 전전긍긍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장모님의 눈치를 살피느라 늘 주눅이 들어 있는 남편과 엄마의 육아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것도 모자라, 직장 생활과 육아 스트레스까지 온전히 내 몫으로 견뎌내야 하는 ‘나’,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퇴근길에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냥 이대로 사라지고 싶어.’

책에선 우울증 초기 환자들이 이런 생각을 한다고 씌어 있었다. 나도 우울증인가.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야 할까. 수만 가지 생각이 교차하던 그즈음 나는 본능처럼 나를 위로하고 또 격려하기 위해, 무엇보다 매일매일 조금씩 슬퍼지고 있는 ‘나’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우연히 아파트 도서관에서 한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독일에서 문화심리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분야를 전공한 글쓴이는 일상의 행복을 되찾기 위해서는 ‘ritual(리추얼)’에 주목하라고 조언했다.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의식, 의식과도 같은 일’을 의미한다는 이 단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다 결혼 전의 내 작은 습관이 떠올랐다. 너무 자유로워서 무료하기까지 하던 그 시절의 나는 금요일 퇴근길이면 꼭 편의점에 들러 장미향이 은은히 풍기는 맥주를 한 캔씩 사서 집에 왔다. 그리곤 저녁을 먹으며 머그컵 가득 맥주 한 잔을 담아 마셨다. 그저 맥주 한 잔일 뿐인데도 일주일의 피로가 씻겨 나가는 느낌, 주말이 시작된다는 설렘, 무엇보다 “언제 결혼할래”라는 사람들의 질문으로부터 멀어져 지금의 이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내가 좋아졌다. 바로 이것이 세상살이의 고됨을 이겨내는 나만의 작은 ‘리추얼’이었고, 이 리추얼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집에서 나만의 작은 리추얼들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첫째 리추얼은‘엄마 바람’이다. 어느 날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엄마가 아이에게 전하는 가슴 절절한 마지막 인사를 보며 나 역시 한 아이의 엄마로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떠난 후에 우리 딸은 무엇으로 엄마를 기억하지? 보이지 않아도 엄마가 어딘가에서는 항상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고민 끝에 나는 매일 퇴근을 하자마자 하루 종일 엄마를 기다렸을 딸아이를 안고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서 우리 딸의 앞머리가 살짝 흔들리는 ‘엄마 바람’을 만들어 준다. 그리곤 나지막이 속삭여 준다. “엄마 바람이 불 때마다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둘째 리추얼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사랑합니다!’이다. 목욕 때마다 머리 감는 걸 싫어해서 늘 울음을 터뜨리는 딸아이가 안타까워 어떻게 하면 머리감는 게 놀이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이 두 번째 리추얼이 만들어졌다. 목욕이 시작되면 제일 먼저 내 심장과 아이의 심장이 맞닿도록 아이를 안아 천천히 하나부터 열까지를 센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큰 소리로 ‘사랑합니다!’를 외치면 딸아이는 그때마다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 리츄얼 이후, 딸아이는 울음 없이 머리를 감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런 작은 리츄얼들이 하나둘 늘어갈수록 나의 우울함도 줄어들었다. 워킹맘으로 살면서 어찌 매일이 행복하기만 할까. 하지만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이 우울감을 덜어내는 나만의 작은 리츄얼들이 있다는 것을…. 오늘도 우리 집에는 매일 매일 승유한테만 부는 ‘엄마 바람’이 분다.

나혜정<경북대사범대 부설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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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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