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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역사 청송 문화재 여행 .9] 수정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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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관영기자
  • 2019-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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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나옹대사가 창건…1896년 의병장 김하락이 승리한 항일전적지

두 그루의 배롱나무를 끼고 높직한 석축위에 자리잡은 수정사 대웅전.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에 위치한 수정사는 고려 공민왕 때 나옹대사가 절 근처 샘물과 계곡에 흩어진 돌이 수정처럼 깨끗하다고 하여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송강리 목계솔밭 지나 수정교 건너 한참을 더 들어가면 솔밭을 등지고 선 수정사 일주문을 만날수 있다. 팔작지붕 아래에 ‘남각산수정사’라는 현판이 눈길을 끈다.
청송의 북쪽 진보면과 파천면의 경계에 비봉산(飛鳳山)이 솟아 있다. ‘봉황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이라는 산이다. 그 산의 남서 사면 골짜기에 고려 말에 세워졌다는 작은 절집이 하나 있다. 수정 같은 골짜기라 하여 절집의 이름은 수정사(水淨寺)다. 그곳은 터가 맑아 하늘의 문 같고, 골이 깊어 천혜의 요새라고도 했다.

들머리 솔밭에 왕평 ‘황성옛터’ 노래비
대웅전은 정면 3칸·측면 2칸 맞배지붕
300년전 화재로 소실된 후 현위치 이전
보수공사때 1715년 건립 상량문 발견
경내에 꽃 많아 천상의 화원으로 불려

#1. 비봉산 수정사

수정사는 고려 공민왕 때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나옹대사는 ‘주변 경치가 아름답고 산속에서 흘러내리는 샘물과 계곡에 흩어진 돌이 수정처럼 깨끗하다’하여 사찰 이름을 ‘수정사’라 했다고 한다. 당시 수정사는 3천여평의 경역 안에 8~9동의 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 꽤 규모 있는 절집이었다고 전한다. 한창 번성할 때의 수정사는 파천면과 인근 진보면 일대의 많은 토지를 소유할 만큼 아주 큰 사찰이었고 지금도 토지대장에 당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수정사를 창건한 이후 마을은 수정동(水淨洞)이라 불렸다. 그러다 약 200년 전 이인묵(李仁默)이라는 인물이 ‘마을 앞 방풍림이 울창하고 맑은 물이 흐른다’ 하여 목계(牧溪)라 고쳐 불렀다.

수정사의 들머리는 송강리의 목계솔밭이다. 수정동을 목계로 고쳐 부르게 한 방풍림이 이 숲일 것이다. 꿈틀꿈틀 하늘로 발돋움하는 200여그루의 소나무들이 약 3천평의 밭을 이루고 있다. 최근에는 솔밭의 100년 이상 된 소나무 고목 10여그루에서 송진 추출 흔적이 발견되었다. 어른들로부터 구전되어 오던 일제의 송진 착취가 실제로 확인된 것이다.

솔밭에는 1940년경 지어진 성황당과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슬픔을 노래한 왕평(본명 이응호)의 ‘황성옛터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왕평의 아버지는 수정사의 주지였다. 그래서 왕평은 15세 때까지 수정사에서 컸다고 한다. 예술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아들 때문에 일본 고등계 형사한테 쫓겨 수정사 스님으로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왕평은 1940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32세의 짧은 생을 무대 위에서 마감했고 수정사 아래에 묻혔다. 그의 아버지가 흙을 한 줌씩 옮겨 그의 묘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목계솔밭 지나 송강길을 따라 들어간다. 기울기가 거의 없는 골짜기는 제법 넓고 길 양쪽으로는 밭이 펼쳐져 있다. 수정교 건너 한참을 더 가서야 길이 조금씩 기울어지며 산으로 든다. 그리고 오른쪽 길가에 솔밭을 등지고 선 수정사 일주문이 나타난다. 육중한 팔작지붕 아래에 ‘남각산수정사(南角山水淨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보통 ‘비봉산수정사’라 불리지만 16세기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899년 편찬된 ‘경상북도진보군읍지’ 등에는 ‘남각산 수정사’라 기록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를 보면 남각산은 탕건을 닮은 아주 높직한 봉우리로 표현돼 있다. 그리고 그 남서쪽 아래에 새가 날개를 펼친 모양의 비봉산이 그려져 있고 그 오른쪽에 수정사가 위치해 있다. ‘비봉산수정사’라는 명칭은 1937년에 간행된 ‘청기지(靑己誌)’에 처음 확인된다. 남각산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의 어느 즈음에 사라진 듯하다.

일주문 앞으로 난 임도가 수정사까지 이어지지만 일주문을 통과해 소나무 숲길로 가도 수정사에 닿는다. 약간 휑한 느낌을 주는 대지에 수정사 건물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다. 아담한 경내에는 대웅전(大雄殿), 산신각(山神閣), 적묵당(寂默堂), 요사(寮舍)가 자리하고 있다.

큰 사찰이던 수정사는 약 300년 전 화재가 일어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수정사는 산내 암자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수정사다. 2016년에는 일주문 앞 밭에서 작업을 하던 중 초석 잔해와 불탑의 기단석으로 보이는 석부재가 발견되었는데, 이야기로만 전해오던 수정사 옛터가 확인된 셈이다.

#2.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73호 수정사 대웅전

수정사 대웅전 내부 전경. 중앙에 불단을 마련하고 측면에 고주를 세워 대들보를 받치게 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커다란 나무 한 그루와 2017년에 지은 3칸 요사채의 뒷모습이다. 주변에 푸른색조의 낮은 가벽을 두엇 세웠는데 마당과 화단을 가볍게 경계 지으면서 동시에 터의 휑한 느낌을 상쇄시키고 있다.

요사채 옆을 지나고 다시 적묵당 옆을 지나면 대웅전 앞마당에 선다. 대웅전은 높직한 석축위에 앉아 있다. 석축의 가운데에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을 놓았고 그 양쪽에는 3단의 계단식 축대가 화계(花階)로 꾸며져 있다. 석축 아래 좌우에 적묵당과 요사채를 두어 대웅전 앞마당은 작은 ‘ㄷ’자 형을 이룬다. 대웅전의 우측 뒤쪽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산신각이 자리 잡고 있는데, 2004년 보수 공사를 하면서 개축한 것이다. 경역의 배면에 그리 높지 않은 비봉산 산줄기가 펼쳐져 있고 각 건물들이 서로를 끌어당기듯 오밀조밀해 첫 인상과는 다른 안온함이 느껴진다.

수정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전면은 겹처마, 후면은 홑처마로 되어 있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정면의 3칸은 기둥 사이를 모두 같은 간격으로 나누고 각 칸마다 세살청판삼분합문을 달았다. 청판에는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내부는 마루를 깔았으며 중앙 뒷면에 불단을 마련하였다. 측면 중앙에 고주를 세워서 대들보를 받치게 하였고, 가구 사이를 창호 없이 모두 벽으로 막았다.

1992년과 2004~2005년에 대웅전의 보수공사가 있었다. 2005년 보수 당시 대웅전의 문짝 9개를 떼어 놓았다가 8~10월 사이에 도난당했다고 한다. 또한 대웅전 보수 공사 때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강희(康熙) 54년 을미(乙未) 3월18일 상량(上樑)’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숙종 41년인 1715년에 건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웅전 기둥에는 ‘장엄염불’의 글귀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

‘원각산에 한 그루 나무가 자라니/ 천지 나뉘기 이전에 꽃이 피었구나/ 푸르지도 희지도 또한 검지도 않아/ 봄바람도 하늘도 어찌할 수 없다네.’

수정사에는 꽃이 많다. 어떤 이들은 숨겨진 천상의 화원이라고도 한다. 이 꽃자리가 의병들의 진자리였던 때도 있었다. 고종 33년인 1896년 의병장 김하락이 청송 안덕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부상병과 새로 모집한 의병을 합쳐 100여명의 혼성부대를 결성하여 천혜의 요새인 이곳 수정사에 왔다. 그리고 그해 4월7일부터 14일까지 7일 동안 왜병 200여명을 맞아 전투를 치러 승리했다. 달아나는 왜병을 추격해 30여명을 사살하고 수정사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날, 천지를 진동하는 포성과 함께 적의 대규모 부대가 기습해 왔다. 열세한 의병은 퇴진할 수밖에 없었지만 김하락은 전날 부상을 당한 2명의 포병을 버려둘 수 없었다. 그는 부상당한 동지를 부축해 수정사 골짜기 동굴에 마른풀을 깔고 눕혔다. 그리고 포병 2명이 숨을 거두자 그들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준 뒤 눈물을 흘리며 수정사를 떠났다고 한다.

적묵당에는 진각국사의 글이 주련으로 걸려 있다.

‘중생들 고통 이르지 못하는 곳에/ 따로 이 한 천지가 있다/ 묻노니 그곳은 어떠한 곳인가/ 크고 고요한 열반의 문이니라.’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고요히 꽃이 피어나는 것은 열반의 문이 열리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현재 수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의 말사다. 또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 항일 의병의 전적지다. 수정사 소속 승려는 주지 1명이며 신도 수는 100여명이다. 조선시대의 것인 수정사 대웅전은 1985년 8월5일 경북도문화재자료 제73호로 지정되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청송군지. 경상북도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 경상북도문화재도록.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불교사찰전서

공동기획지원 : 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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