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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의 魂 樓亭 .7] 청기면 구매리 괴정재·구산정·초계정·산옹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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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관영기자
  • 2019-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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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 골짜기 구통마을 네 스승 기리는 네 개의 정자 ‘우뚝’

영양 청기면 구매리에 위치한 괴정재는 정면 2칸, 측면 1칸 반에 팔작지붕을 올린 아담한 정자다. 통정대부 김경진이 1861년에 지어 말년을 보냈다. 김경진은 용모와 자태가 우뚝하고, 문장과 지혜가 탁월했다고 한다.
양근김씨 영양 입향조라 알려진 구산 김수근의 정자인 구산정. 구산이 기거했던 정자는 세월이 지나면서 황폐해져 1941년 후손들이 몇 칸의 집을 짓고 옛 정자의 이름인 ‘구산정’ 편액을 걸었다.
구매리 마을 가장 깊은 골짜기 끝 부분에는 산옹초려가 자리를 잡고 있다. 통정대부 김상필의 정자인 산옹초려는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계곡의 자연석 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초계 김상진의 정자인 초계정은 건립 당시 4칸 규모로 겹처마에 기와지붕을 올린 대단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정면 2칸, 측면 1칸 반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형태로 바뀌었다.
영양 청기면의 구매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긴긴 골짜기다. 그 길 끝의 좁은 골을 ‘구통(九通)’이라 부르는데 ‘아홉 개의 골짜기가 그 너머와 통한다’는 뜻이다.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포위’된 땅이건만 그곳의 비범한 사람들은 ‘통(通)’이라 하였다. 마을은 양근김씨(楊根金氏) 집성촌이다. 시조는 김인찬(金仁贊)으로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이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함께한 조선 개국 공신이다. 구통에 터를 잡은 이는 1700년대의 김수경이라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마을은 작다. 산 아래 계류가에 2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이 작은 마을에 1920년대 이전까지 4개의 문중학당이 있었고 그로부터 4개의 학계가 조직, 운영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30년대에 이르러 각각의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4개의 정자를 건립하였다. 괴정재(槐井齋), 구산정(九山亭), 초계정(蕉溪亭), 산옹초려(山翁草廬)가 그것이다.

#1. 괴정재

괴정재는 통정대부(通政大夫) 김경진(金磬振)이 1861년경에 지어 말년을 보낸 곳이다. 그는 일찍이 이곳에 작은 괴나무를 심었다. 나무는 점차 자라났고 이윽고 그늘이 뜰을 가득 메웠다. 그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며 초당(草堂)을 짓고 괴정(槐亭)이라고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괴정은 퇴락하여 방치되었는데 1943년에 그의 후손들과 고을의 선비들이 중건한 것이 지금의 괴정재다.

괴정재는 마을 입구에서 가까운 산 아래에 계류를 향해 앉아 있다. 삼면은 낮은 토석 담장으로 경계 지었고 전면에 사주문을 열었다. 마을 안길에서 바라보면 짧은 고샅길 끝에 사주문이 보인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1칸 반에 팔작지붕을 올린 아담한 모습이다. 2칸의 온돌방과 계자난간을 두른 반 칸의 툇마루가 전부다. 온돌방의 정면에는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측면에도 외여닫이문과 쪽마루를 두어 출입을 용이하게 했다. 처마도리에 괴정재 편액이 걸려 있고 방문의 상부에는 권수승(權秀升)이 쓴 기문과 시판들이 빼곡하다.


◆괴정재
통정대부 김경진 1861년 건립 말년 보내
선조 유풍 이으려 후손들이 1943년 중건

◆구산정
구산 김수근의 정자…1941년 다시 지어
정면 3칸 팔작지붕…좌우 온돌방 배치

◆초계정
고향서 학문에 정진한 김상진의 정자
고졸한 멋은 없으나 산 중턱 시야 넓어

◆산옹초려
통정대부 김상필의 정자…2007년 중건
정면 2칸…계곡 자연석 위에 자리잡아



김경진에 대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기문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용모와 자태가 우뚝하고 문장과 지혜가 탁월했다고 한다. 그러나 좋은 시대를 만나지 못해 뜻을 펼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시대가 바로 철종 때였음을 상기하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이곳에 조용히 앉아 왼편에는 투호를 장만하고 오른편에는 거문고를 놓고 앞에는 벼루를 열고 뒤에는 술두루미를 두었다 한다. 그러한 가운데 취하고 글을 읊고 시냇물 소리를 듣고 해와 달과 안개 낀 산수를 바라보며 때로는 괴나무 정원을 거닐었다 한다. 후손들이 괴정재를 다시 지은 의미는 ‘구매의 산수를 사랑하고, 효와 우애를 중시하며, 시와 예를 즐긴 선조의 유풍(遺風)을 이어받아 실천하는 것’이었다.

#2. 구산정

구산정은 사인첨정(舍人僉正) 구산(九山) 김수근(金守瑾)의 정자다. 그는 양근김씨 영양 입향조라 알려져 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인종, 명종, 선조 연간으로 추측되며 일설에는 그의 손자가 입향조라는 주장도 있다. 김수근은 벼슬길이 크게 열렸으나 홀연히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해 학문에 정진하다가 삶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기거했던 정자는 세월이 지나면서 황폐해졌고 후손 김규박(金圭珀), 김찬진(金燦璡) 등이 문중과 상의하여 몇 칸의 집을 짓고 옛 정자의 이름인 ‘구산정’ 편액을 건 것이 1941년이다.

구산정은 마을의 한가운데, 계류와 나란한 안길에 접해 있다. 약간 높은 지세를 석축으로 여물리고 토석 담장을 올려 사주문을 세웠다. 문을 들어서면 살짝 몸을 틀어 마을 입구 쪽을 향해 앉은 정자와 마주한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는 대청, 좌우는 온돌방이다.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난간 없는 툇마루를 두었고 측면과 배면에는 쪽마루를 둘렀다. 정자에는 구산정 편액과 고종 때의 학자 김홍락(金鴻洛)이 쓴 기문, 그리고 시 한편이 걸려 있다.

김홍락은 기문에서 ‘산을 좋아하는 어진 자가 물을 좋아하지 않은 적 없고, 물을 좋아하는 지혜로운 자가 산을 좋아하지 않은 적 없다’고 했다. 그리고 구산 김수근을 산과 물의 기상을 가진 인물이라 하였다. 시는 구산정의 정경을 읊고 있는데 그것은 정자와 주인, 그리고 그들을 회고하는 모든 후손들의 심경까지 담은 듯하다.

‘세상의 근심을 모두 거두어 구름을 바라보고/ 고인을 추억하며 책상머리를 대하네/ 일만 골짝과 높은 솔엔 늙은 학이 잠들고/ 맑은 물이 돌아 흐르며 갈매기를 불러 맹세하네.’

#3. 초계정

구산정에서 고개를 들어 북쪽의 산자락을 바라보면 그 중턱에 초계정이 방긋 자리한다. 초계정은 초계(蕉溪) 김상진(金尙桭)의 정자다. 김상진은 1864년 구매리에서 태어났다. 고종 때 가선(嘉善)에 증직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서 자연을 벗 삼아 학문 정진에만 힘을 쓰다 193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찍이 파초를 심고 계류를 바라보는 것을 즐거워해 스스로 초계라 호를 지었다고 한다. 원래 정자는 4칸 규모로 겹처마에 기와지붕을 올린 대단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현재의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2칸의 온돌방에 반 칸의 툇마루를 두었다. 툇마루는 정면 기둥 밖으로 마루 끝을 확장해 반 칸보다 조금 더 넓고 양 측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온돌방은 툇마루 쪽에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쪽마루 쪽에는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기둥은 정면 툇기둥만 원기둥이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인데 개량기와를 올렸다. 담장은 블록벽돌로 쌓았고 사주문의 지붕도 개량기와를 썼다.

정자에는 초계정 현판과 속은(俗隱) 오석도(吳錫燾)가 쓴 기문이 걸려 있다. 오석도는 1910년 청기면장에 임명되었으나 고사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진 교육에 전념한 인물로 초계의 벗이었다.

기문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소양대연헌(昭陽大淵獻) 남려월(南呂月) 상한(上澣)’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계해년 음력 8월 초순경에 쓴 것으로 보인다. 병우(病友)라는 단어로 미루어 짐작컨대 1923년이 아닐까 싶다. 초계정은 고졸한 멋은 없으나 시야가 넓다. 어지러운 시절에 초야에 묻혀 후진을 기르는 데 힘을 쓴 초계와 속은의 우정을 상상하면 정자에서 바라보는 너른 세상이 초계정에 담긴 의미가 아닐까 한다.

#4. 산옹초려

마을의 가장 깊은 골짜기 끝에 산옹초려가 위치한다. 산옹초려는 통정대부(通政大夫) 김상필(金商弼)의 정자로 2007년에 중건했다고 한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1칸 반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2칸의 온돌방에 반 칸의 툇마루를 둔 모습이다. 툇마루는 기둥 밖으로 조금 확장시켜 동바리기둥으로 단단히 고정했다. 기둥은 정면 툇기둥만 원기둥이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이다. 온돌방의 툇마루 쪽에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측면에는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계곡의 자연석 위에 정자를 앉힌 것으로 보이며 기단은 시멘트로 마감했다. 정자의 처마도리에 산옹초려 편액이 걸려 있다. 그 외 기문과 정자의 주인이 쓴 시편, 그리고 고종 때 참봉을 지낸 김병식(金秉植)의 시 편액이 있다.

김상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기문과 시편만이 이 정자와 주인에 대해 말해줄 것 같은데 그 소리를 알아들을 재간이 없다. 서늘한 산 그림자를 밟고 흐르는 물소리가 적막을 깨뜨릴 뿐.

다만 ‘일만 골짝과 높은 솔에 잠든 늙은 학’과, ‘고인을 추억하며 책상머리를 대한다’는 시구가 구통의 네 정자와 그 후손들을 알려주는 가장 진중한 그림으로 느껴진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영양군지.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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